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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04 (13)
깊이에의 강요
당연한 것들조차 모두 막아서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볼수록 불보듯 뻔할 것 같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솔직히 너무 불편했고, 스크린을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영화의 끝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로 이어졌다. 이렇게도 분명한 부조리… 스토리와 별개로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이름이 ‘재기’였는데, 이름이 불릴 때마다 오염되었던 단어가 조금씩 먼지와 오물을 털어내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의도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그랬다. 언젠가부터 잘못 해석되던 말, 더 나아가 혐오를 위해서만 발화되던 단어. 덧씌워진 것들을 조금씩 벗겨내며, 본래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것. 내가 빚진 게 참 많다. 국민은행 009901-04-017158 ..
교황 프란치스코. CBCK 가정기도서 모임 때문에 내적 자세를 좀 다져야할 필요가 있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교황님 글을 매번 놀랍다. 그저 좋은 말이거나 누구나 아는 당연한 말이 아니고 따뜻함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거나 위로에서 끝나는 말도 아니다. 깊은 통찰에서 그치지도 않고 심오하거나 난해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나 사람을 기도하게 만들고 세상을 향하도록 돌아 세운다. 기도문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자세부터 다잡게 만드는 교황님 글의 힘은 … p.34 "마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듯이, 오늘날 존재하는 악들을 단순히 말로만 비판하는 것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 p.69 "사랑은 그 자신 안에 갇혀 있으려는 모든 충동을 거부합니다." p.73 "인내와 노동의 기쁨, 형제..
박상영 지음. 창비. 은희경 작가의 이후 도전해 본 오디오북. 부커상 후보에도 올랐다 하고 작가 이름도 자주 본 것 같아 골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려웠다. 수작업을 하는 동안 들으려고 선택한 오디오북이었는데, 이게 눈으로 읽는 것과 누군가의 목소리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내 삶이 이런 삶인지라 많이 감안했다 하더라도, 소화가 가능한 수준 이상의 이야기와 단어들. 퀴어소설이어서라든가, 내용이 별로라든가, 재미가 없다든가 같은 말이 아니다. 내가 듣기엔 너무 적나라하고, 한편으로는 어렵고, 솔직히 부담스러운 이야기였다. 몇 번을 돌려들어도 도저히 귀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딴에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마저도 속단이자 장담이었단 걸 인정해야 했다. 하다하다 부커상 후보작과는..
박정은. 서사원.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통역사의 성장 에세이. 숙제로 읽긴 했지만 이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이들은 어떤 기도를 해야할지, 알려주시길 기도하며 읽은 책이다. 필요에 의해 읽은 책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한 부모 가정의 아이였다. 물론 이 책의 작가와는 경우가 좀 다르긴 했지만, 나 역시 주위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성장시켰는가 싶어서 새삼 감사했다. 나를 키워준 모든 이들의 사랑으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으니 나의 삶이 기도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향하길 바라고 기도한다. 작가의 다음 말이 마음에 많이 남는다. “이 글을 통해 배우자와 헤어졌어도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더불어 나의 잘못이 아니었던 일임에도 나를 한없이 깎아..
김초엽 소설집. 한겨레출판. 방금 떠나온 세계는 무얼 말하는 걸까. 돌아가지 못할 만큼 멀어지지는 않은 세계. 낯설고 어색해질 만큼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세계. 가야할 곳보다는 아직 편안하고 익숙한 세계. 어쩌면 지금 돌아서서 돌아가도 되는 세계. 하지만 ‘떠날 이유’가 분명한 세계… 단편들을 읽으며 그 세계를 생각했다. 함께 이루어가는 걸 잊고 사는 것. 나와 다름을 타인의 부족이라 여기는 편협함. 분명히 있지만 모두가 감각하지는 못하는 것에 대한 존중의 결여. ‘정상’을 정하는 비정한 기준. 자비와 배려가 없는 원칙… 어쩌면 작가는 우리에게 이 세계를 떠나자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떠남은 버려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꿔나감으로 완성되는 희망이다. 역시 김초엽. p.13 "나의 기록은 죄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