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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방금 떠나온 세계 본문
김초엽 소설집. 한겨레출판.
방금 떠나온 세계는 무얼 말하는 걸까. 돌아가지 못할 만큼 멀어지지는 않은 세계. 낯설고 어색해질 만큼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세계. 가야할 곳보다는 아직 편안하고 익숙한 세계. 어쩌면 지금 돌아서서 돌아가도 되는 세계. 하지만 ‘떠날 이유’가 분명한 세계…
단편들을 읽으며 그 세계를 생각했다. 함께 이루어가는 걸 잊고 사는 것. 나와 다름을 타인의 부족이라 여기는 편협함. 분명히 있지만 모두가 감각하지는 못하는 것에 대한 존중의 결여. ‘정상’을 정하는 비정한 기준. 자비와 배려가 없는 원칙… 어쩌면 작가는 우리에게 이 세계를 떠나자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떠남은 버려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꿔나감으로 완성되는 희망이다.
역시 김초엽.
p.13
"나의 기록은 죄다 이런 식이다. ‘오판이었다’ ‘실수였다’ ……"
p.14
"그들이 거주지 전체를 점령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인간들이 설치해둔 함정을 제거하지 못했거나, 이 넓은 공간 전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p.45
"기계들이 간과했던 것은, 라이오니에게는 다른 생물이, 그리고 다른 생물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기체의 존재 조건이었다. 기계들과 달리 인간은 유기체의 죽음 위에 삶을 구축한다."
p.50
"나에게는 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엇을 것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알았고, 그래서 셀을 다독여줄 수 있었다."
p.124
"하지만 진, 당신도 알 거예요. 우린 그들을 설득할 수 없잖아요. 이해할 수도 없고요. 우리는 그저······ 기다릴 뿐이예요. 다가올 변화를.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뭘까요."
p.126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
p.175
"이제 조안은 단희의 바로 옆이 아니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제야 단희는 사람들이 조안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흘끔거리는 눈빛, 공기를 채우기 시작하는 웅성거림, 기묘하게 왜곡되는 조안을 둘러싼 중력장을. 예전에는 짐작만 할 뿐 피부로 느끼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 시선들이 단희 자신을 향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p.293 ~ p.294
"나는 늘 인내심을 가지고 언니를 설득했다. 언니가 정확히 얼마나 힘든지, 치료를 받을 때 무엇을 느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정확히 전달하려면 우리 사이에 많은 시간이 있어야 했고 동일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런데 언니와 나 사이에는 완전히 다른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공유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차이를 좁히고 싶었다. 그러면 언니와 내가 다시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는 없더라도, 함께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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