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깊이에의 강요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본문

雜食性 人間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하나 뿐인 마음 2022. 3. 14. 09:21

최승자 에세이. 난다.

죽음을 생각했다. 한 개인의 죽음, 어떤 세대의 죽음, 시대 사조(思潮)의 죽음, 언어의 죽음…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시작. 전혀 다른 출발.

그리고 내겐 첫 죽음의 경험이었던 아버지의 죽음과 시간과 경험상으로는 두 번째이나 유일하기에 여전히 첫 죽음의 경험인 엄마의 죽음을 떠올렸다. 시인과는 달리 이 죽음을 겪으며 오히려 나는, 습관처럼 그저 몸에 밴 신앙의 껍질을 겨우 한 겹 벗어버렸다. 사람이, 의식이 없는 편에 가까울 그 순간, 모든 것과 이별하는 그 강제적 순간에 그렇게 차분하면서도 확신에 찬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자신이 곧 도달하게 될 하늘 나라에 대한 명료한 확신 하나만 남는 순간을 목격하면서 어린 아이가 그동안 듣고 꿈꾸던 하늘 나라는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듯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순간은 조금만 더 연장해 주기를,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의 불안한 믿음과 정반대의 순간이었다. 병간호를 하고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신앙이 점점 커지고 있다 여겼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믿음의 단계는 그렇게 곧 끝났던 것 같다.

시인의 어머니의 죽음. 내 엄마의 죽음. 각각 죽음을 겪고 다른 결론을 냈지만 결국 같은 결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끝났음을 선언’한 후의 시인의 삶이 내겐 또 다른 것을 희망하는 삶 같았으니 말이다.


p.13 ~ p.14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거대한 타의 - 오로지 물욕만을 따라 외곬로 뻗어가는 광기, 조직과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무서운 능력, 그 아래에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삭과 야곱의 모든 살붙이들의 선량하고 괴로운 관계 등 그런 모든 것이 합세하여 내 운명의 세포조직을 만들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내 인생과 운명의 배후에서 후렴처럼 비가 내린다. 그 빗속에서 내가 꿀 수 있는 꿈이 자꾸 줄어들고, ‘인간답게’라는 가치 기준이, 진리가 자꾸 모호해져간다."

p.14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

p.14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야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답게 죽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항해서 싸우는 필사의 길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 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p.30 ~ p.31
"기존의 도덕률은 마치 합법적 정통성 위에 세워진 전권을 부여받은 최고 권력구조와도 같아서, 그 권력에 위배되는 것을 반역으로 몰아붙인다. 그리고 대다수의 민중은 기존 도덕률의 보이지 않는 강압적인 힘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며 거기에 맞추어 자신이 부도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 이미 자신은 도덕적이라고 믿으면서 도덕의 기득권 아래 편히 안주하려 하고, 때로는 기존의 도덕에 브레이크를 거는 새로운 가지체계의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벌을 선고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안정된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불안스럽고 혼란스럽게 되지 않기 위하여, 도덕의 카리스마적 특성을 이용하여 도덕 자체를 의식의 무기로 만들 수도 있다."

p.53 ~ p.54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비로소 나는 그래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명분,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본능을 되찾은 것 같다.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죽음의 감각을 산산이 깨뜨려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와 각오를 갖게 해준 것이리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가장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닫는다는 게 한심스럽고 한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p.54
"미래의 지평을 확신할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자는 궁극적으로 현재 안에 매달리게 되고 현재 안에서 모든 게 해결되지 않으면 절망해버리고 만다. ‘지금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치 내일이란 것을 영원히 모르는 하루살이처럼."

p.59 ~ p.60
"인간은 강하되, 그러나 그 삶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아주 떠나지는 못한 채, 그러나 수시로 떠나 수시로 되돌아오는 것일진대,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한번 물으면 어느새 비가 내리고,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두 번 물으면 어느새 눈이 내리고, 그사이로 빠르게 혹은 느릿느릿 캘린더가 한 장씩 넘어가버리고, 그 지나간 괴로움의 혹은 무기력의 세월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 띄워놓고 보면, 사랑인가, 작은 회한들인가, 벌써 잎 다 떨어진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한 해가 이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p.81
"사람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가족과 이웃과 사회 일반으로부터 많은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게 되고, 그 받은 것을 밑받침으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하여 결국 어느 때엔가는 자신이 받은 만큼 주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해야 할 도리로서."

p.158
"나는 하늘에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로움을 그리기보다는 그들 날갯짓의 중노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雜食性 人間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금 떠나온 세계  (0) 2022.04.05
중국식 룰렛  (0) 2022.03.28
나는 무엇을 믿는가  (0) 2022.02.24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0) 2022.02.22
일기  (0) 2022.02.1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