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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십자가의 길 (20)
깊이에의 강요
육중한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결국 당신은 넘어지셨습니다. 당신은 저희의 죄 때문에 넘어지시는데, 저희는 한낱 자아의 욕심에 눌려 넘어집니다. 그러면서도 왜 넘어져야만 하는지 아직도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저희의 죄는 당신을 넘어지게 하고 저희 자신도 넘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넘어짐도 십자가 길의 일부이기에, 고통이 아무리 극심할지라도 당신이 저희를 위해 마련하신 때에 기꺼이 넘어지게 하소서. 넘어지는 순간에도 당신을 사랑하겠나이다.
십자가 길에서 만나신 성모님이 당신께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는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알겠습니다. 저희는 턱없이 부족하오나,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성모님 같은 수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끝없는 인내와 희생, 지극한 사랑이 당신께 둘도 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처럼 저희의 인내와 희생, 지극한 사랑이 세상에 더없는 위안이 되게 하소서. 하오나 저희는 나약하오니, 힘들고 지쳐 어머니를 부를 수조차 없을 때 어머니, 저희를 만나주소서.
금방이라도 허물어져버릴 것 같은 당신의 모습과 피곤에 지치고 마음 아파하는 이웃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예수님, 지금 저희에게 당신의 그 십자가를 주십시오. 당신의 십자가는 애초부터 저희 모두의 것이기에,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 역시 바로 저희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하오니, 행여 무슨 큰 도움이라도 주는 양 너그러운 척 할 것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임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온 세상이 예수님을 도운 사람으로 시몬을 기억하듯, 저희의 이름은 사라지고, '예수님을 돕는 수도자'라는 이름만 남게 하소서.
피땀으로 얼룩져 일그러진 당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제 삶의 길에서 넘어지고 쓰러져 홀로 울고 있을 때 제 눈물을 닦아주시며 다시 일어설 힘을 주셨던 당신이 보입니다. 제 자신과 수도공동체의 쇄신, 저희의 기도가 절실한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작고 소박한 것의 가치를 자꾸만 놓치며 살아갑니다. 주님, 지금이라도 저희들을 위해 피땀 흘리신 당신 얼굴을 닦아드릴 수 있는 은총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 당신은 또 넘어지십니다.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저희들의 아둔함으로 당신은 또 넘어지셔야 했습니다. 당신을 외면하고 이웃의 고통도 온전히 안아주지 못한 저희를 대신해서 넘어지신 예수님, 이제 저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진정 당신과 함께 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넘어짐도 수치와 모욕이 될 수 없사오니, 예수님, 당신과 세상 모든 이를 위한 희생과 봉사와 인내의 넘어짐을 기꺼이 저희에게 허락하소서.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울고 있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당신의 고통을 바라보며 우는 것, 이웃의 아픔을 바라보며 연민의 마음으로 우는 것이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이제 제 자신을 위해 웁니다. 저의 죄에 대해서, 저의 불충실함에 대해서 웁니다. 저의 못남으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제 이웃을 보며 웁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함으로써 참된 신앙인이 되고 참된 수도자가 되도록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은 이제 십자가를 질 힘만 남았습니다. 땀을 닦을 힘, 부당함에 눈물 흘릴 힘, 신음소리를 낼 힘조차 없고 오로지 십자가를 질 힘만 남은 예수님. 하지만 아직도 저희 안에는 부당함에 투덜거릴 힘, 자기연민의 눈물을 흘릴 힘, 악습을 유지할 힘, 타인을 판단하고 오해하며 심지어 미워할 힘까지 남았습니다. 예수님, 저희에게도 십자가를 짐 힘만 남겨주십시오. 수백 번을 넘어져도 끝까지 일어나 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수 있도록 주님, 제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