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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64)
깊이에의 강요
얼어붙은 남한강 한가운데에나룻배 한 척 떠 있습니다첫얼음이 얼기 전에 어디론가멀리 가고파서제딴에는 먼바다를 생각하다가그만 얼어붙고버리고 말았습니다나룻배를 사모하는 남한강 갈대들이하룻밤 사이에 겨울을 불러들여아무데도 못 가게 붙들어둔 줄을나룻배는 저 혼자만 모르고 있습니다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니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가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묵묵히 무릎을 꿇고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정호승 -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정호승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소리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바람뿐이드라. 밤허고 서리하고 나 혼자뿐이드라. 거러가자, 거러가보자, 좋게 푸른 하눌속에 내피는 익는가. 능금같이 익는가. 능금같이 익어서는 떠러지는가. 오- 그 아름다운 날은...... 내일인가. 모렌가. 내명년인가. - 미당 서정주_ (사진은 내 트친 스티브 님의 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