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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64)
깊이에의 강요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
마흔을 기다렸다 詩 함순례 산허리에 구름이 몰려 있다알 수 없지만내가 가고 있으니 구름이 오는 중이라고생각한다 빗속에서 바라보는 구름은고등어처럼 푸릇했으나 파닥거리지는 않는다추녀에 매달려 울던 빗방울들이호흡을 가다듬는 저녁 다섯 시점점 켜지는 불빛들 바라보며 묘하게마음 편안하다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에방점을 찍는다 그 옆에 사랑은 세숫비누 같아서닳고 닳아지면 뭉치고 뭉쳐빨래비누로 쓰는 것이다,라고 적어놓는다저 구름을 인생이라 치면죽지 않고 반을 건너왔으니열길 사람 속으로 흘러들 수 있겠다,고 쓴다마흔, 잘 오셨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바닥은 보이지 않지만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바닥까지 걸어가야만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더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발이 닿지 않아도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비닥의 바닥까지 갔다가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더이상 바닥은 없다고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눈이 내리는 날에도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지는 날에도 정호승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정호승
(스티브 님의 사진)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지구 위를 걸아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