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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 본문

雜食性 人間

이처럼 사소한 것들

하나 뿐인 마음 2024. 7. 22. 08:57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다산책방.
 
너무 쓸쓸한데 또 너무 따뜻하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책을 덮고 하늘을 보며 자꾸만 울고 싶었는데,
책을 덮고 나서는  한참을 울고 난 후 마음 속에 따뜻한 물이 다시 고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 누구의 삶이 아닌 나만의 삶을 살아가며
빛을 낸다는 것.

이 쓸쓸한 삶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쓸고 닦아
생애 어느 한 순간
빛이신 그분을 만나
잠시라도 반짝 빛나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한 삶을 살고 싶다.


P.29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P.36-37
다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펄롱은 네드가 오래 전 크리스마스에 선물해 주었던 보온 물주머니를 생각했 다. 그 선물을 받고 실망하긴 했으나 그것 덕분에 밤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따스함을 느꼈다. 다음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펄롱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끝까지 읽었다. 미 시즈 윌슨은 펄롱에게 큰 사전을 이용해서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라며, 누구나 어휘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펄롱은 그 단어는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어희'가 아니라 '어휘'였다. 이듬해 펄롱이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부상으로 밀어서 여는 뚜껑을 자로도 쓸 수 있는 나 무 필통을 받았을 때, 미시즈 윌슨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 미시즈 윌슨이 말했다. 그날 종일, 그 뒤로도 얼마간 펄롱 은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 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다녔다.
 
P.99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 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 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 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P.106-107
펄롱이 뒤로 물러서며 미시즈 케호를 마주 보았다.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냐. 미시즈 케호는 말을 멈추고는 극도로 현실적인 여자가 가끔 남자들을 볼 때 짓는 표정, 철없는 어린애 보듯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일린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사실 꽤 많았다.
"내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미시즈 케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정말 열심히 살아서, 나만큼이나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고." 펄롱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곧 누그러졌다. "알아요, 아주머니."
"이 근방에서 잘 풀린 여자애 중에 그 학교 안 다닌 애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야." 미시즈 케호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
"압니다.“
“교단은 다르지만 다 한통속이야. 어느 한쪽하고 척지면 다른 쪽하고도 원수 되는 거야."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크리스마스 잘 보내, 빌."
"크리스마스 잘 보내세요." 펄롱이 말하며 자기가 받은 거스름돈을 다시 미시즈 케호의 손에 돌려주었다.

P.119-120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 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 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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