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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인생의 역사 본문
신형철 시화. 난다.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시는 행(行)과 연(聯)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行 아래로 쌓여가는聯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 <책머리에> 중에서)
신형철의 신작이긴 하지만, 수년 전 한겨레에 연재한 '신형철의 격주시화'를 수정, 보완해서 낸 책이다. 읽은 글도 분명 제법 있었을텐데 하나하나 새로웠던 건 그때와 지금의 '나'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오십이 되어 생각한 '인생'이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반백년의 경험을 어루만져가며 책을 읽었다고 할까. 아니면 내가 살아온 시간에 비추어 시를 이해해보려고 했다고 할까.
시를 읽으며, 글을 읽으며 '산다는 것', 그 '흐름'에 대해 생각했다. 한달 남짓 책는 읽는 동안 만큼은 깊은 숲속, 때론 굽이치기도 하며 때론 조용히 흐르기도 하는 계곡 옆에 앉아 쉬면서 가끔 손을 집어 넣어 물의 흐름을 끊기도 하고 그 흐름을 느껴보기도 하는 시간이었고, 좋았다.
신형철은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고 했다.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고. 사는 일도 그렇고 내겐 기도도 소임도 그렇다.
p.25
"사랑의 조심은 우선 '너'에 대한 조심이다. 나는 물건을 자주 떨어뜨린다. 거기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꽉 쥐지 않기 때문이 다. 그러는 이유도 하나뿐이다. 떨어뜨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떨어뜨리면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결함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대체로 여기에 있다."
p.59
"타인을 '안다고 여기는' 태도는 언제나 위험 한 것이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완전한 폭력이다. 이런 폭력은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에게 권력이 있을 때 발생한다."
p.68
"고통의 성별을 지우면 고통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
p.90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 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p.123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으니 그의 생은 내내 고달팠겠으나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리라."
p.131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p.221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이번 생에서 네가 얻고자 한 것을 얻었나?/ 그렇다./ 무엇을 원했길래?/ 이 지상에서, 나를 사랑 받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레이먼드 카버는 자신이 겪은 아픔을 ‘그렇다 하더라도even so’에 욱여넣고, 그랬지만, 많이 아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았다고 긍정한다. 우리가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가장 진솔하게 말하는 데 성공한 이 시에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단 한 글자도 없다."
p.226
"여럿이 마시는 사람은 희망이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이고, 혼자 마시는 사람은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전자가 결국 절망뿐임을 깨달으면 귀가하다 혼자서 한잔 더 할 것이고, 후자가 끝내 희망을 포기 못하겠으면 누군가를 불러내 한잔 더 할 것이다."
p.227
"시의 문장이 쉬워도 시인의 마음이 쉽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p.228
"서둘지 말고, 바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라. 이 셋은 자주 엉킨다.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은데, 이룬 것이 너무 없어 당황스러울 때, 그때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위험한 때다. 김수영이 걱정한 것도 그것이지 않을까. 빨리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에 지면 나를 잃고 꿈은 왜곡된다."
p.234
"일생이란 결국 하루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왜 살고 나서 돌아보면 그 많은 날은 가뭇없고 속절없는가, 왜 우리는 그 나날들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하는가. 시간을 사는 인간의 이런 종(種)적 결함이 원통해서 눈물이 났던 것일까."
p.244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를 원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이유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를 바란다는 것."
p.250
"동아시아 윤리학의 맥락에서 ‘덕’은 이상적 인간상에 이르기 위한 금욕적 노력의 성과를 떠올리게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에서 ‘덕arete’은 인간을 행복eudaimonia으로 인도하는 어떤 탁월한 자질들을 의미한다. 전자가 ’옳은‘ 삶을 향한 자기극복의 노력이라면, 후자는 ’좋은‘ 삶을 향한 자기실현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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