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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본문

雜食性 人間

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하나 뿐인 마음 2023. 4. 16. 20:35

모리스 젱델 글. 밀양 가르멜 여지수도회 번역. 성바오로.

사순절 봉재책으로 읽은 책. 올해 사순절을 피정하듯 차분하게, 그러나 덜 분심하며 더 치열하게 보낼 수 있었던 건 이 책 덕분이다. 피정 강의록인데, 단순하면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믿음을 열렬히 갈망하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었다. 살아보면 무디어지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열심히 살기를, 느슨해진 태도를 단단하게 조이기를 원하면서도 막상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데 젱델 신부님 말씀은 날을 벼리듯 내 수도삶을 하느님 앞에서 갈고 닦을 ’이유‘를 상기시켰다. 나는 그 이유를 하느님 안에서 찾고자 했지만 정작 ’나‘를 잊지는 못했는데 젱델 신부님은 ’이유를 찾으려는 나‘마저도 하느님으로 바꾸도록 부드럽지만 명확하게 이끈다.

모리스 젱델 (Maurice Zundel)
모리스 젱델 신부는 1897년 스위스의 뉴샤텔에서 태어났고 1975년 로잔에서 세상을 떠났다. 철학박사였던 그는 시인이기도 했고 신비가이고 전례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는 1930-1940년대에 이미 인권문제, 종교의 자유, 고용문제, 성 교육등 여러 문제를 열린 눈, 새로운 영성으로 다루어 당시의 몇몇 교회 지도자들로 부터 날카로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모든 오해는 1972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를 피정 강론자로 초대함으로써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스위스, 프랑스, 이집트, 레바논등에서 많은 피정 지도와 강의를 했다. 오늘날 성인에 가까운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는 그의 많은 저술들은 그 새롭고 드높은 영성과 더불어 경탄과 감동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고 있다.


p.34
"사람이 덕이니 겸손이니 하는 행위로 자신을 꾸미고 있는 동안에는 거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p.34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숨어 있는 한, 참하느님은 우리에게 숨어 계십니다."

p.34 ~ p.35
"저는 억지로 믿으려고 자신을 강요하면서 하느님을 믿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저는 이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나’가 없을 때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나날의 삶처럼 그렇게 확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참하느님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될 때에만 비로소 참된 하느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게 ’나‘인 한 그건 ’그분‘이 아닙니다. 그게 ’그분‘이실 때 그때는 정말 그분께서 거기에 계십니다."

p.34
"우리가 스스로를 덕이라는, 신심이라는, 종교라는 외투 속에 감싸고 있는 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초연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사실은 어떤 힘을 과시하면서 우리 신앙을 증거하는 셈이 됩니다."

p.41
"주님은 이단자나 죄인들에 대해 어느 정도 호의를 갖고 계셨습니다. 이단이나 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단자나 죄인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유다인이신 주님께서 왜 이방인이나 죄인에게 더 호의를 보여 주셨을까요? 물론 그것은 주님께서 외적인 분류로 영혼을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만남입니다.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입니다."

p.43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단자나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호감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엄청난 양의 바리사이주의가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아름다운 간판을 내걸고서 신앙 활동을 하고 전례에 잘 참석하는 것은, 자신이 계명대로 살고 있다는 기분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p.46 ~ p.47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잠잠하게 만들고 싶어 했듯이,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없애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목소리가 너무나 옳고 너무나 진실했기에 도저히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 가지 남은 유일한 방법은 그분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이상 그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지요."

p.46
"주님은 우리를 본질적인 데로 데려가십니다. 주님께, 종교란 그 열매를 보고 판단되는 것이니까요. 종교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게 하지 않고 어떤 인간이 되게 합니다."

p.46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무기로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정직함을, 그리고 그들이 도저히 이르지 못할 단순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p.46
"영혼들 안에는 정의가 존재합니다. 가장 무자비한 정의가. 바로 그 정의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그런 척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시늉을 할 수는 있지만, 끝까지 숨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

p.48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핵심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솔직해지도록 노력하라고, 단순해지고, 참되고 올바른 것에 대한, 진짜에 대한 깊은 분별력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기를 원하십니다."

p.55
"우리는 하느님이 가장 강하신 데서 그분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가장 선하신 데서 그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p.103
"여러분은 자기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여러분이 수녀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맡겨졌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집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먹여 살리시고, 하느님께서 묵게 해 주십니다."

p.107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뽑히게 된 특전을 받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바리사이주의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정말 어느 누구도 감독해야 할 미성년자처럼 대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p.118
"만일 우리가 그처럼 많이 참아야 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그처럼 철저하게 비웃음을 당하고 비난받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러면서도 미소를 띠고 먼저 다가가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빛나고자 하시는 바로 이 거룩한 현존 때문입니다."

p.120
"우리는 끝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내 성체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신 그 은총을 믿고, 그 미래를 믿고,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의지하면서, 끝까지 가야 합니다."

p.131
"죄란 무엇보다도 내적 문제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 자체를 결정짓습니다. 그 죄가 참으로 대죄라면 그 죄는 우리의 영원성을 결정짓습니다."

p.133
"매순간 우리의 자유는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요, 하느님의 권능에 자신을 열게 하는 힘이며, 우리를 영원하게 만드는 이 대화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힘입니다. 죄를 짓는 이유는, 언제나 저 위대함에 대한 야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성’에 대해 등을 돌릴 때,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조금밖에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저 거룩한 위대함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p.134 ~ p.135
"유혹을 완전히 끊어 버리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어떤 순간이든지, 어떤 공포에 사로잡히더라도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 당신은 거기 계시고 저를 보고 계십니다. 당신은 이 폭풍우 속에서 저의 삶에 가치가 있는 것을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 당신 곁으로 더 가깝게 이끌어 주시고, 저에게 더 큰 자유를 주게 되고, 동시에 저를 당신과 더욱 하나 되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이 폭풍우에서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

p.139 ~ p.140
"모든 본능의 호소에는 현혹이 따르며, 인간은 이 현혹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는 오직 그 희한한 호소를, 동요를, 그리고 이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은 이 약속만을 느낍니다. 하지만 저 마음 깊은 데서 자기가 무엇에 초대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힘의 저 깊은 곳에 어떤 무한한 ‘현존’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p.144
"열정을 마치 단죄해야 할 불쾌한 것으로 여기고, 열정과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열정들을 빛 속으로 데려와 하느님의 빛 속에서 그 열정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p.144
"열정들을 몰아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들 밑바닥에는 이미 덕의 표지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145
"하느님을 찾은 사람 역시 우선 자기 열정들을 하느님의 빛 앞에 드러내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빛 속에서 자신의 열정들을 봄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그 열정들을 완성하고 풍성히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열정들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열정들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는 첫 표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 주신 것은 그 무엇도 죽어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p.148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사랑 어린 온유하심을 믿고 기다리면서 자신을 살펴보는 동안 빛을 내려 주시고 폭풍우를 가라앉혀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p.149 ~ p.150
"악이란 바로 하느님의 부재입니다. 악은 자신의 그리스도의 빛 위에 던져진 베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순환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선이란 하느님의 자유로운 순환입니다. 즉 하느님을 우리의 온몸에 전달하고 온 존재의 호흡이 되게 하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p.157
"하느님을 전하려면 언제나 맑고 투명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 행위는 하느님을, 저 ’무한‘을 찾는 행위입니다. 자신은 이것을 잊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p.169
"주님은 수난을 통해서 메시아가 되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온갖 원수를 땅바닥에 넘어뜨림으로써 메시아가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p.171 ~ p.172
"육화란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안 계시던 이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느님 앞에 인류가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 없었지, 하느님께서 안 계신 적은 없습니다."

p.181
"승천 이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통해서만 눈에 보일 수 있게 되셨습니다. 저 육화가 우리를 통해서 연장된다는 것은 가장 놀랍고 멋있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모든 신비입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p.181
"우리가 완전하게 되고 싶은 마음이 없고 노력하기에 지쳐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신뢰하셨다는 이 사실은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p.181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하느님께 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화된 신성이므로 눈에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를 통해서만 눈에 보이게 됩니다."

p.181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에게는 여러분밖에는 다른 그리스도가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유일하게 여러분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찾을 것이며,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사랑스런 분이 되시는 만큼 그들은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며, 그것이 우리의 손 안에 주님을 맡기시는 무관히 관대한 부르심입니다."

p.182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만들어졌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그리스도의 현존이 되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위치에서 하셨을 일을 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주님의 행위를 계속하고,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내어 주고 소모되고 먹히며 다른 이들에게 자양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p.182
"나 자신이 온갖 결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습니다."

p.183
"우리가 완전히 힘이 빠져 지쳤을 때도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늘 필요로 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오늘날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유일한 기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드디어 ‘때’가 완성되고 세상은 구원될 것입니다."

p.188
"수도 생활은 교회적 삶이며, 그 공동체는 집단적 성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p.188
"교회 편에서 수도 소명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자신을 셩화하려고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목적의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수도 공동체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일부가 되려면 자신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수도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편적이고 세계적 시야를 지녀야 하며, 어떤 사명을 완성한다는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p.189 ~ p.190
"수도자의 순종은 “가십시오.”라는 파견의 되풀이입니다. 순종은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것입니다. 숭종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파견된 자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종의 신비 안에서 모든 것을 바꾸기 때문에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순종은 교회 자체처럼 파견의 성격을 지닙니다. 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순종입니다. 교회도 파견되었고, 교회도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p.189
"우리는 수도 소명이 지닌 이 교회적 성격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스럽게 살도록 초대받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난과 정결의 정신으로 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동체 생활이라는 이런 독특한 생활 형태에서 살도록 초대 받지는 않았습니다."

p.194
"수도 생활을 사도적 생활 이외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수도 생활은 교회의 파견의 한 형태입니다. 수도 서원은 개인의 성화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공동체의 사도적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p.201
"애덕은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사람에게 우정을 느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를 뛰어넘어서 그 사람을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 다시 만나도록 노력하기를 요구할 뿐입니다."

p.203
"공동체의 또 다른 애덕은 ‘신중함’입니다. 어느 공동체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서로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마음을 써주는 것이 우선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 앞에서 그 여인이 무안해하지 않도록 눈을 내리뜨신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마음 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종 눈을 내리뜨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 정탐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p.209
"우리는 인간다워야 합니다. 성스러움이란 자연스러움의 변용이지 파괴가 아닙니다. 인간의 성스러움은 천사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한계가 있으며 우리는 그 한계를 존중해야 합니다."

p.228
"주님의 인성은 우리 앞에 현존하기를 멈춘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인성 앞에 있지 않았던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p.232
"성찬례는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으로 붙잡고,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을 뜻합니다."

p.235
"하느님께서 내 마음속에 사셔야 합니다. 그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하고 나 자신이 감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힘으로 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나무 감실 안에 계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진정한 감실입니다."

p.236
"성체성사의 의미는 성체를 현시하는 그런 식의 행위에 있기보다는 우리가 미사에서 행하게 되는 행위, 즉 우리가 십자가를 만나러 가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바로 그와 같은 행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체 현시는 그것이 우리를 보편적이 되게 해 주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새롭게 봉헌하는 행위가 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p.251
"양심 성찰은 우리 자신 앞에서 해서는 안 되고 주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뿐입니다."

p.251
"양심 성찰이란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열어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는 우리 자신에게 돌아서기 위해서 예수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255
"완덕의 길을 딛는 첫발은 불완전하게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체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것이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p.258
"그 사람이 찾고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어떻게 그를 실망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사람이 피곤에 지친 사람만 발견하게 될 때 얼마나 말할 수 없이 상처를 받겠습니까?"

p.259
"완덕이란 우리 자신의 완덕을 즐기기 위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를 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덕이란 하느님의 생명을 방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들이 되고, 그분의 현존 안에 우리 자신을 잃음으로써 이 현존을 전하는 것입니다."

p.261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미소를 보냈을 때 그 미소가 무표정한 얼굴에 떨어지면 그 미소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 다정한 마음에 응답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힘에 대한 가장 암시적인 예입니다. 이 예는 허공에 떨어지면 아무 힘도 못 쓰는 하느님 사랑의 전능한 힘을 가장 잘 암시해 줍니다."

p.263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기적을 행하시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거기서는 적의를 만나셨기 때문입니다."

p.265
"성사는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날 하나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있지 않으면 성사는 우리에게 아무 뜻도 없을 것입니다."

p.274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을 때, 피곤하고 실망했을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모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어머니에게 하듯이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며 성모님의 빛나는 광채 앞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p.275
"성모님은 우리에게 평온함을 주시는 분이며, 만사를 뚜렷이 보게 해 주시는, 만사를 조용한 방식으로 보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고 싶어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빛 속에서 우리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보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p.284
"우리의 유일한 힘은 주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것,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 주님은 우리 존재와 우리 삶의 중심이시라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순간 그분의 심연 속으로, 그분의 사랑 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것, 그것만이 우리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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