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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슬픔의 방문(장일호 에세이) 본문
장일호 에세이. 낮은산.
작년 첫영성체를 끝내고 한 아이의 엄마가 와서 꼭 책 한 권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었다. 실은 ’싶었다‘고 했다. 괜찮다고 하다가 ’싶었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애지중지 품고 있던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나를 알고 난 후에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스스르 웃게 했다. 한 권이라는 말도 좋았고, 골라달라는 말도 좋았다.
내 사진폴더에도, 독서앱에도, 메모에도, 심지어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도 읽고 싶은 책들이 담겨 있지만 그 어디에도 담아놓지 않았던 이 책을 골랐다. 그즈음 신선한 바람이 필요했는데 며칠동안 트위터에서 본 문장들이 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고, 난 서슴 없이 ‘슬픔의 방문’이라고 카톡을 보냈었다.
신선한 바람 같은 책이길 기대했지만, 한적한 공원 모퉁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낡고 투박한 벤치 같은 책이었다. 깔끔하진 않지만 조용하고 오래된 나무 냄새와 드리워진 그늘까지 완벽해서 먼지 같은 건 신경 쓰이지 않는, 적당히 불편한 오래된 나무 벤치. 내가 왜 이제야 이 장소를 발견했지? 내가 왜 이제서야 이 벤치에 앉았지? 일어나야 할 시간을 놓치게 하고,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나를 머물게 한, 머물게 할 그런 벤치.
오랜 만에 <슬픔이 방문>이 넘겨주는 책들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부를 목표로 하고 다 읽지 못해 스스로 실망하고 싶진 않아, 고르고 골랐다.
···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평등해야 건강하다>
<연필 깎기의 정석>
<사당동 더하기 25>
<염소의 맛>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다정한 호칭>
<드링킹>
<어떻게 죽을 것인가>
<가난 사파리>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노란 들판의 꿈>
<우리 아이들>
p.9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p.54
"빈부 격차가 가져온 기회의 차이는 단시간에, 단 하나의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른인 내가, 또 우리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어린 사람에게 ‘운’이 되어 주는 일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 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다.”(로버트 D. 퍼트넘, <우리 아이들>, 정태식 옮김, 페이퍼로드)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았으면 좋겠다."
p.209
"어떤 직업을 좋은 일, 필요한 일로 만드는 힘과 책임은 그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권할 수 있으려면 내가 선 땅이 좋아지도록 부지런히 일궈야 한다. 저 짧은 두 문장(기자가 되면 정말 좋아. 빨리 기자 해.“)을 자신 있게 건네려면 그만큼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한다. 일의 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일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어디 기자만이 그럴까.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런 노력에 힘입어 나아진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망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아주 망친 일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p.251
"상처받는 마음을 돌보는 슬픔의 상상력에 기대어 나의 마음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곤 했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남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 기꺼이 슬픔과 나란히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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