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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위쪽으로 떨어지다 본문

雜食性 人間

위쪽으로 떨어지다

하나 뿐인 마음 2021. 2. 16. 15:26

리처드 로어 지음. 이현주 옮김. 국민북스.

 

솔직히 말하자면 번역 어투 때문에 몇번이나 고개를 갸웃했다. 이 책이 정말 이런 문체였을까 싶긴 했지만(약간 자기 계발서 같았다...) 내가 알 길이 없으니, 그저 끝까지 읽어보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 적은 구절은 많기도 하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하느님이 없는 교회'에 관한 생각이다. 점점 하느님의 논리가  통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성경에 나오는 좋은 말씀이고, 하느님의 뜻을 찾음이 머쓱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는 슬픈 생각. 좋긴 좋지만 지금은 내 생각대로, 맞긴 맞지만 우선은 이렇게... 내 삶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뜻을 기어이 관철시켜야 하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그러다보면 자꾸 입을 다물게 되고, 눈을 감게 되고, 해롭지 않은 말씀이나 마음 따뜻해질 말씀만 전하며 살고 있다는 후회가 밀려와 자꾸만 마음이 아팠다. 서로 마음 상하게 되느니 좋게 좋게 지내다가 소임을 마치는 게 최선일까 싶은 슬픈 결론을 자꾸만 결심하게 되고. 

 

그래서 "예언자들이란 자기 메시지를 사람들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하지 않는 부류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해야 하는 말이라서, 그리고 진실이라서 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괜히 울컥했다. 다만 들어야 하는 말만으로 전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하는 말과 내 삶이 일치하도록 살아낼 때 하느님의 말씀은 들려지고 보여질 것이다. 내 삶 자체가 메시지가 될 때까지...


p.11
"“하늘에 감추어져 있는”(콜로 3,3) 근원적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동안 배워서 알고 있는 것들을 지우는 작업이다. 그렇다. 변화는 배움(learning)보다 배운 것을 지움(unlearning)에 더 많이 연관된 것이다. 세계의 종교들이 그것을 ‘회심’ 또는 ‘회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1
"우리 영혼은 우리가 만들거나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성숙’시킬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서투른 청지기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깨어나는 것이다."

p.12 ~ p.13
"참 종교는 우리가 그것을 부인하거나 회피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 자신이 처음부터 아주 좋은 어떤 것에 ‘동참’되어 있음을 깊이 직관한다. 실제로 현대 신학의 탁월한 공헌은 단순하게 관찰하고 확인하며 윤리도덕을 세우고 특정 집단에 소속되는 일반 종교에 반대하여, 강력한 ‘동참에로의 전환’(turn toward participation)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새삼스레 결합할 무엇이 없다. ‘동참자’로서 인식하고 괴로워하며 즐길 무엇이 있을 따름이다.당신은 ‘영원한 흐름’ 안에 이미 들어와 흐르고 있다."

p.12
"우리가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고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서 받고자 원하시는 것은 겸손하면서 오만하게 본디 우리에게 주어진, 그래서 본디 우리 것인 그분의 작품(product)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다."

p.19
"우리는 성장보다 생존을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한다.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 또는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보다 일단 정상으로 올라가는 일에 몰두한다. 토마스 머튼이 말하듯 평생을 바쳐 성공의 사다리를 꼭대기까지 올랐는데 막상 오르고 나서 보니 그 사다리가 엉뚱한 벽에 걸쳐 있더라는 얘기다."

p.22
"인간은 죄나 실수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그것들을 피하려 하면 더 나빠질 수 있다. 예수는 바리사이파와 세리, 방탕한 둘째 아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쪽은 어떻게든지 바르게 살려고 애쓰지만 실제로는 잘못되고, 다른 쪽은 잘못을 범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로 바뀐다!"

p.22
"실패와 고통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다. (보통 종교인들이 생각하듯이) 당신이 무슨 나쁜 짓을 하면 그런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당신이 총명하고 올바르게 살면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 일은 당신한테 일어날 것이다. 당신이 경험하는 상실, 몰락, 실패, 죄 그리고 고통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이고 길을 가는 당신을 위해서 좋은 것들이다. "

p.24
"하느님이 성스러움을 감춰두시기에 불완전한 인간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그러니 오직 겸손하고 진지한 사람만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에게 불완전한 구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남의 불완전함을 용서하고 끌어안는 그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다."

p.24
"우리는 자신의 ‘잘한 행위’보다 ‘잘못된 행위’에 의해 영적으로 훨씬 더 성장한다. 영적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해주는 핵심 메시지가 이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

 

p.25
"많은 사람이 아픔을 부정하고 필요한 몰락을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영성에, 따라서 자신의 가장 높은 영성에 닿지 못한다."

p.27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만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무엇임을 이해한다. 아래로 떨어진, 그것도 잘 떨어진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위’를 오용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p.48
"울타리를 치고 자기 정체성을 지키고 종족을 번식하고 본능 다스리는 교육을 받는 것 정도로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p.49
"성숙한 사람은 방어도 공격도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p.49
"“공격을 의도하는 사람들보다 공격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더 많은 고통이 세상에 초래된다.”(켄 케이스) 자기들을 공격한다고 여겨지는 상대를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더 큰 공격이 이루어지고, 이런 주고받기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 말고는 자기 방어의 명분으로 이어지는 핑퐁 게임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당신도 알다시피, ‘참 자아’는 누구를 공격하기가 정말 어렵다!"

p.51
"모든 종교의 존경받는 원로들은 언제나 용서하고 자애롭고 포용한다. 그들은 적을 만들지 않고, 자기네 집단의 출발점에 선 자들이 만든 울타리를 넘어서면서도 그것들을 존중하고 필요하면 활용하기도 한다. 유대인 예수는 유대교를 거침없이 비판했지만 그것을 떠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성숙한 사람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의 큰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이다. "

p.52
"변화와 성장이 당신 영성 안에 처음부터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두려움과 광신의 맹목성에 대한 경고가 없다면, 당신의 종교는 언제까지나 당신 에고의 지위와 기득권을, 마치 그것이 하느님인 양 옹호하는 데 머물러 있을 것이다. "

p.52 ~ p.53
"변화에 대한 저항은 너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종교인이라고 예외이기를 기대할 순 없는 일이다. 실은 종교인일수록 미래나 현재보다 과거를 더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전해 받고 넘겨준다."

p.52
"당신은 스스로 문명인이라면서 여전히 진화 초기 단계의 자기중심적 위치에서 남을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지독한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가장 근사한 포장들 가운데 하나가 예절 바르고 우아하게 미소 짓고 문명을 즐기는 것이다. "

p.53
"예언자들이란 자기 메시지를 사람들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하지 않는 부류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해야 하는 말이라서, 그리고 진실이라서 하는 것이다."

p.55
"분명, 순수한 하느님 체험은 언제나 ‘너무 많다’! 그것은 우리의 거짓 자아를 황폐화시킨 뒤에야 비로소 우리의 참 자아를 위로한다."

p.65
"당신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는 안정된 가정과 종교의 틀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먼 여정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안전 체제 또는 자기가 이끄는 종단에 들어오라는, 그러면 생계를 책임져 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p.73
"스스로 넘어지기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균형을 잡지 못하는데, 자기가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들의 삶이 그토록 고달픈 이유가 여기 있다."

p.83
"인류 역사의 수많은 전쟁, 비극, 대학살이 지도자의 통솔에 맹목으로 따르는 대중들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런 지도자와 이데올로기가 주는 약속을 의존하는 데서 오는 이상한 위로가, 그것들이 우리를 악으로 이끄는 데도 불구하고 존재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짐에서 놓여나게 한다."

p.83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리기까지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안락과 안전을 등지고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복음서는 가정을, 가족과 함께 그동안의 생계 수단을 떠나라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는 것이다."

p.93
"인생 전반부에서 우리는 악마와 싸우고, 종종 그를 ‘이겼다’는 착각에 빠져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인생 후반부에서 우리는 싸우는 상대마다 어김없이 하느님인 까닭에 언제나 진다."

p.96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이 ‘비밀리에’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당신 일을 하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면, 신비/운명/하느님/은총이 우리한테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가 전체 과정을 망가뜨리거나 중단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기의 사망(demise)을 기꺼이 그리고 자세히 살피려 하지 않는다. 비록 죽어가는 것이 자기의 거짓 자아라고 하더라도!"


p.102
"우리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는 것은 우리가 정상이고 선하며 옳다고 여기는 이 세상의 ‘변두리’에 몰려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이다. 그들에게는 사물의 어두운 그늘과 신비스러운 측면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성향이 있다. 그런 연속적인 ‘예외들’이 우리고 하여금 이른바 규범이라는 것,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 방문하고 다시 재어보게 만든다! 예외들은 우리를 걱정과 염려를 안고서 해결책을 향하여 달려가는 대신 겸손하게 하고 탐구하게 한다."

p.104
"예수는 모든 것에 들어맞는 단일한 도량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에 그의 하느님은 순간의 실패자들과 엉뚱한 자들에 오히려 적응하신다. 인간의 실패와 무질서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 하느님의 섭리 또는 자비라 한다. 모든 때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p.109
"우리는 희생자를 비난한다. 아니면 거의 그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면서 인간을 위해 희생자가 된 하느님의 형상을 예배하고 있다. 나는 당신의 죄가 당신한테 가르치는 것을 모두 배우기 전에 당신이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다면 그것이 다른 형태로 되돌아올 것이다.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처럼."

p.145
"성령은 언제나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데, 우리가 우리를 위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위하는 것 같다. 우리를 심판하고 비난하는 부정적인 목소리들에 맞서 우리를 옹호해 준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내 인생 내 힘으로 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완벽한 인생을 올바르게 살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 없겠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p.146
"우리의 삶은 동정녀 마리에에게 그랬듯이, 그냥 ‘우리한테서 이루어지는’ 것일 따름이다. 물론 다른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 다, 똑같이 진실이다. 이 신비를 가리켜 하느님과의 ‘협력’ 또는 ‘함께 숨쉬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p.149
"우리는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중독,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술책, 생각 없는 오락 따윌 감히 우리 영혼과 마음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악의 모양은 흔히 ‘대죄’(hot sins)라고 부르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맹목적이고 표피적이다."

p.149
"하느님은 모든 것의 ‘깊이’ 속에, 특히 우리가 저지른 과오와 실패들의 밑바닥에 숨어 계시고 거기서 발견되신다. 비록 성경, 교회, 교회의 성사 같은 거룩한 것들이라 해도 그 ‘거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죄다."

p.155
"자기의 참 자아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종교의 진정한 임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를 옳은 집단에 소속시키고 옳은 전례를 행하고 옳은 신조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가치 경쟁으로, 개인의 공로로, 종교적 성취로 빠져들게 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 오늘 종교의 현실이다. "

p.160
"아무도 최후의 결별과 고독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한 지옥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을 결국 자기의 가장 깊은 욕망을 그대로 두느냐 아니면 지워버리느냐에 달린 문제다."

p.176
"완전치 못하고 추락하는 자기를 용서할 때 비로소 당신은 다른 사람한테도 그럴 수 있다. 자기 자신한테 그러지 못한다면 당신의 슬픔, 부조리, 심판, 무용을 남들한테 떠넘기려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이만 먹고 참된 원로가 되지 못한 늙은이들이 걷는 딱한 길이다. "

p.184
"나는 더 이상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최고임을, 우리 인종의 우월함을, 내가 믿는 종교만이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종교임을, 사회에서 차지하는 내 위치와 역할이 특별하게 대접받을 만한 것임을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 더 많은 선행과 봉사를 쌓는 일에 전념하지 않아도 된다. 아주 단순하게, 내 욕망과 노력은 날마다 돌려주는 데 있다. 그동안 받은 큰 은혜를 세상에 돌려주는 것이다."

p.188 ~ p.189
"내면의 밝음이 다른 어떤 전쟁, 분노, 폭력,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잘, 그리고 지속적으로 악에 대처하는 방편이 된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렇게 빛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전부다. 그러면 그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바요 인간됨의 궁극 목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바로 그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p.188
"성 프란체스코는 악이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냥 ‘떨어짐’에,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 안으로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데 당신 생애를 모두 바쳤다. 그것이 그분이 알고 있는 하느님 안으로 떨어지는 유일한 길이었다."

p.189
"사람의 말은, 그것이 몸으로 되지 않는 한 밝게 빛날 수 없는 물건이다."

p.198
"참으로 거룩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한 사람들이다. ‘그늘’을 ‘죄’와 혼동하지만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훨씬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죄와 그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건 좋은데, 그래서 자신의 그늘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 결과 자기도 모르게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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