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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음악의 언어 본문

雜食性 人間

음악의 언어

하나 뿐인 마음 2021. 3. 6. 16:24

송은혜 지음. 시간의흐름.

기도하는 삶을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지름길이 없는 곳, 정도(正道)를 걸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결국 기도를 하는 나와 기도가 하나가 되어야 하듯 악기도 그럴 것이다. 챕터 하나하나 모두 좋았다. 작곡가 이야기, 빠르기 이야기, 악기 이야기, 연주자 이야기... 이야기 뿐만 아니라 챕터마다 소개해주는 음악이 있어, 음악까지 감상해가며 책이 이끌어주는 대로 조금씩 읽었다. 내 템포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책의 템포와 내 템포를 맞추는 독서.

내게는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그만 둔 길이 있다. 그만두었기에 지금은 어설프게 ‘조금 더 가 본 ‘사람으로 살고 있다. 미련이 없을 줄 알았고 조금 더 가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상에서 뒤돌아 나와 들어온 수녀원에서 나는 그 길이 오래도록 아쉬웠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이젠 놓았다. 내겐 나 자신이 나의 기도와 하나가 되는 길만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희망하기에.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조금 더 젊은 수녀였을 때 대축일 시편창이나 중요한 행사에 시편창을 해야할 때면 그날이 올 때까지 그 시편을 묵상하고 목을 아끼고 말을 삼가고 운동을 하면서 몸과 정신을 다듬었다. 노래하기 위해 몸을 다듬어 정돈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영혼을 맑게 하는 시간을 지나야 시편을 노래했던 시절. 이제는 대축일 시편창을 노래하는 대신, 내 삶으로 주님을 노래하는 일만 남았구나.


p.25 ~ p.26
"나를 대면하는 시간. 정확히는 나의 부족함을 바로 보아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 음악 연습이다. 혼자 연습하는 시간, 선생님과 함께 연습하는 시간, 청중들 앞에서 연주하는 시간 모두 연습의 과정이다. 조금 더 나아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약점을 파악하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나아질 길을 찾고, 선생님께 점검받고, 길을 수정해보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긴 여정. 유튜브 썸네일 광고 문구처럼 ‘10분 완성’으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때쯤이면, 이미 한 단계 올라섰다는 뜻이다. 멋지게 음악을 연주하는 방법까지는 아닐지언정, 실망해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단계. 습관적인 좌절과 사소한 성공의 경험들에 익숙해지면 연습은 달콤한 꿀을 넘어 그 중독성에 이끌려 자꾸만 찾게 되는 쌉싸름한 커피가 된다."


p.64
"길을 잃고 질문을 던지는 동안 나도 모르게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음악을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법을 온몸으로 익혔다. 우연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기도 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의 특권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동안에도 나는 음악 안에 있었다.”

p.84 ~ p.85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주선율을 연주하는 것도 멋지지만,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주선율이 빛나도록 받쳐주는 소리가 얼마나 강력한 매력을 가졌는지 알게 되면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존재감이 강한 주인공보다는 전체의 균형과 색채를 조율하며 타인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의 자리. "

p.84
"서로 다른 소리를 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음악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다. 삶에서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포용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항상 같은 소리를 내야 하며, 남과 다른 의견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미덕이다. 하지만 음악에서는 그렇지 않다."

p.89
"즉흥연주도 결국 연습으로 완성된다. 패턴과 형식을 연습해 새로운 주제가 주어질 때마다 그에 맞게 적절히 변형하는 것, 포기하고 넘길 순간도 잘 알아보는 것이 즉흥연주의 묘미 아닌가. 앙상블 음악을 통해 나와 다름을 포용하고, 상대에게 귀기울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즉흥연주 같은 삶에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p.114
"규칙적인 박을 따르며 보이지 않는 시간의 윤곽선을 상상하는 연습은 생각지 못한 효과를 낳기도 한다. 우리는 대개 쉼표를 무시하거나 정해진 길이보다 짧게 인식한다. 음이 없는 부분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습을 통해 시간의 윤곽선을 가늠하게 되면 쉼표가 주는 여백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침묵이 가진 색채와 효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으리라. "

p.129 ~ p.130
"외부 환경이 급격히 변할 때, 리스테소 템포를 떠올린다. 변화하는 상황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대신, 중심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나의 템포로 새로운 상황을 끌어안을지 고민한다.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힘들어질 뿐이다. 갑작스러운 리듬의 변화에 음악이 경직되듯이, 나 역시 잔뜩 긴장한 채 종종걸음을 치게 된다. 나의 중심에 먼저 집중하고 나의 속도를 알아야만 그에 어울리는 적절한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p.134
"드뷔시가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봄>을 듣고 전통에서 벗어났다며 비판하는 평단에게 드뷔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은 자연의 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대신 우리 인생의 봄을 들려줍니다. 느리고 허약한 존재들,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개화하여 재생산에 이르는 눈부신 축제와 같은 즐거운 봄을 이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봄’이라 하면 습관처럼 떠올리는 이미지가 아닌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작곡가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작곡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봄>에서 드뷔시는 악기들이 자신의 고유한 음색을 펼칠 기회를 주었다. "

p.185 ~ p.186
"강약 조절이 쉽지 않은 오르간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야 한다.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없으니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폐활량은 태생적 한계를 지니지만, 무한대로 소리를 낼 수 있고 오래 지속해도 소리가 흐트러지지 않는 오르간은 듣는 이에게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선사한다. 유약한 인간이 신의 품을 찾을 때, 오르간은 반듯한 소리로 신을 향해 노래하며 인간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덤덤하게 덮는다."

p.186
"독일 성가에 기반해 작곡한 바흐의 오르간 작품에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신께 마음을 의탁하는 신자의 바람이 담겨 있다. 오른손의 멜로디는 인간의 연약함을 묘사하듯 첫 두 음을 제외하고는 도약 없이 구슬프게 흐르지만, 평온하고 안정적인 왼손과 발 건반의 반주는 현재의 고통에서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p.186 ~ p.187
"온갖 종류의 악기 소리를 이론으로 연구해 파이프로 재현하는 형이상학적 악기. 악기에 연주자가 몸을 맞춰야 하는 친절하지 않은 악기. 인간의 감정에서 한 걸음 떨어져 인생을 관조하는 악기. 그래서 때때로 다시 오르간으로 돌아간다. 인류에 환멸을 느낄 때, 희망이 없다 느껴질 때, 신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그 순간순간마다."

p.190
"교회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돌아오는 울림 때문에 당장 귀에 들리는 소리만 믿고 그의 맞춰 연주하면, 연주 속도는 한없이 느려지고 음악은 생기를 잃는다. 그러니 오르간 연주자는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몸의 움직임을 믿어야 한다. 쉽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감을 믿고 나가야 한다."

p.203
"음악은 어울리는 음과 어울리지 않는 음으로 이루어진다. 아니, 이 문장을 틀렸다. 그 어떤 음도 서로 어울릴 수 있다. 보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음이 있고, 언뜻 듣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들리는 음이 있다. 부자연스러운 음도 어떤 맥락에서 어떤 비중으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의미 있는, 혹은 매력 있는 음이 된다. 틀렸다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대신 유연한 관점을 갖춰야 하는 이유다. 한 가지 문제에 천 가지 답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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