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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창세 28,16) 본문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창세 28,16)
야곱은 자신의 야심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질렀고, 그에 대한 댓가를 치르기 보다는 도망을 선택한다. 아버지의 보호도 어머니의 사랑(편애)도 없는 곳에서 도망자 신세가 된 외로운 빈털털이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가던 피곤한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비로소 주님의 현존을 느낀다.
나는 언제 주님의 현존을 느꼈던가 생각해 본다. 가끔은 어둠이 심연을 덮듯(창세 12) 내 얄팍한 지식이 나의 믿음을 덮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현존 속에 머물고 있는가, 주님은 언제나 현존하신다는 교리 지식에 따라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야곱이 자신의 야심에 집중했을 때, 갖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그것이 비록 하느님의 축복이었다 하더라도)를 향해 집념 하나로 내달릴 때는 느낄 수 없었던 하느님의 현존. 재산도 많았던 집안의 아들로, 어머니의 편애를 받던 작은 아들로, 강한 집념으로 웬만한 목표는 다 이룰 수 있었던 강한 인간으로 살아갈 땐 어쩌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를 하느님의 현존. 지팡이에 의지해 가난하고 초라하고 고단한 도망자가 되어 어둔 밤 허허벌판에 홀로 누웠을 때 무엇을 잊고 살았던가를 알아차렸던 야곱처럼, 나 역시 지금 무엇을 잊은 채 이렇게나 쉴틈 없이 달리고 있는지를 이 허한 외로움 속에서 떠올린다.
가로채고 속여가며 얻고자 하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었으나, 야곱은 모든 것을 잃고 또 잃고 속고 또 속은 후에야 비로소 그 축복을 손에 쥐게 된다. 난 태생적으로 집념과 거리가 먼 인간이라고 스스로 정의하는 사람이라 늘 야곱과 멀다고 여겼지만 술수를 부리면서도 막상 조용하게 천막 안에서 살아갔던 야곱이었음을 생각해보면 허망한 것들로 인해 여전히 마음 흔들리는 나 역시, 야곱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은 허기졌던 순간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치웠던 에사우의 경솔함을 나무라지 않으셨고, 형이 약점을 이용해 냉큼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의 이기심도 탓하지 않으셨다. 야곱을 향한 어머니의 무분별한 편애도 에사우를 향한 아버지 이사악의 불공정한 편애도 하느님은 그냥 두셨다. 내가 선을 행할 때도 악을 행할 때도, 행복에 겨울 때도 지쳐 무너질 때도, 헛된 욕심을 부릴 때도 가난하고 초라할 때도 그저 내 곁에 계시는 분. 선악시비를 판단하시고 그에 따라 머물렀다 떠나가시는 분이 아니라 그 어느 순간에도 내 곁에 계시는 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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