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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루카의 우물 (197)
깊이에의 강요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루카 24,28-29) #dailyreading 이 장면이 바로 영성체구나 싶었다. 그러니 영성체란, 더 멀리 가셔야 하는 분을 우리가 붙드는 일, 함께 묵자고(“Stay with us.”) 청하는 일, 결국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묵으시고자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일.
(착한 사마리아인)비유는 강도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작점으로 선택하시는 때는 이미 공격을 당한 이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건에 대하여 비탄에 젖는 데에 멈추어 있거나 강도들에게 눈을 돌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 며칠 전 찍었던 매발톱꽃 사진을 보고 어느 신부님이 ‘어쩌자고 삶의 피멍이 저리 들었나’ 했고, 나는 ‘상처 입었다 말하기보다 살다보니 상처와 더불어 사는 법을 알게 되었나 보다’ 했다. 그리고 이 대화를 이틀 내내 곱씹었고, 어제 저녁 교황님 회칙 을 다시 읽다가 이 구절에 멈췄다. 예수님께서 시작점으로 선택하시는 때는 '이미 공격을 당한 이후'라는 것, 즉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이다. 복음에서 강도 피해를 당한 사람의 치유는 강..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41-43) #dailyreading 두려워 했고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 제자들 앞에서(위해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신 예수님. 오늘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한다. 사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것이 당신께는 불필요한(하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태어나신 것도, 가르치신 것도,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모두 그랬다. 나는 종종 ‘꼭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무의미해 보인다는 이유로,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처사라는 이유..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루카 15,12) 오늘 묵상은 작은 아들의 이 말에서 멈췄다. 당당하게 요구한, 아들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 말이 아버지에겐 얼마나 가슴 아픈 말이었나. 내게 당연하고 당당했던 수많은 말들이 그분께도 그들에게도.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먼서도 자꾸 까먹는다.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루카 10,1) 오늘은 복음을 읽자마자 이 첫구절에서 멈췄다.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 지명 받은 이들이라고 해서 저절로 그 삶이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부쩍 하게 된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고 이 삶을 시작했지만 그 사실만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삶은 아니다. 살면 살수록 그렇다. 아무리 선명한 거울이라도 틈틈이 닦아 놓지 않으면 어느 순간 더 이상 나를 비추지 않는 것처럼, 너무나 읽고 싶었던 책을 구했다 해도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어내지 않으면 그 책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거울을 가진 ..
이번 주 복음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단락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5-36절) 우리는 예수님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지요? “예.”라고 대답하신 분들은 행복합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돌아와서 깨어 있는 종들을 보게 되면 ‘종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종들이 행복하다니요. 과연 그럴까요? 주인이 돌아와 깨어 있는 종을 보았는데, 주인이 아니라 종이 왜 행복할까요? 이 이유는 다음 장면이 우리에게 잘 설명해 줍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루카 1,46-47) 워크숍 중에 이 꽃을 보고 오늘 말씀을 떠올렸었다. '영혼'이 찬송하고 '마음'이 기뻐 뛰는 삶. 평생을 한곳에 머물며 소리 없이 피고 지지만 찬송하고 기뻐 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노래를 불러야만 찬송인 것이 아니고, 소리 치며 두 발로 달려야만 기뻐 뛰는 것이 아니니 하고 싶은 일도 가고 싶은 곳도 물론 있지만 세상과 교회,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며 지금 여기에 머무는 내 삶도 분명 그렇다 싶었다. 찬송과 기쁨은 영혼과 마음의 일.
곰곰이 생각하였다.(28절)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복음을 묵상하다가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천사의 말 말고, 성모님의 대답(반응)만 따로 떼어서 읽고 또 읽어봤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이런 태도로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꼭 두렵고 떨리는 중대한 선택이 아니더라도, 내키지 않아 한마디 말도 하고 싶지 않다거나 한사코 미루고만 싶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무엇인가. 많은 경우에 난, 내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 지금도 이후도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지, 나아가 사람들의 반응까지 염려하다가 그 일이 이루어져야하는 진짜 이유는 외면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