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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06/09 (7)
깊이에의 강요
은희경 연작소설. 문학동네. 낯선 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일까. 낯설고 새로운 곳에 도착한 사람은 자신의, 타인의 낯설고 새로운 모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은희경 작가는 드러내지 않고 그저 슬쩍 보여준다. 하지만 슬쩍 드러난 인간의 실상이 실은 너무 아름답고 눈부셔서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다. 이번 소설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우물, 너무 맑아서 좁은 천장을 통해서도 하늘 전체를 담을 수 있는 깊고 깊은 우물 같았다. 나는 자꾸만 목이 마르고 들떠 올라 우물 아래로 얼굴을 가져다 대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정세랑 작가의 책이 ‘역시나 정세랑’이라면 은희경 작가의 책은 내게 있어 ‘이래서 은희경’이다. p.45 "무언가가 있다고 강조하는 건 원하는..
정세랑 장편 소설. 난다. 정세랑 장편의 시작을 이제야 만났다. 역시나 정세랑. 이제야 만났는데 더 일찍 읽지 못해 아쉽기 보다는 이제라도 만난 ‘지금’에 더 감사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역시나 정세랑’이 이 책에 가장 어울리는 리뷰이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 어여 어여 읽으세요. 읽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마이클 베다드 글. 바바라 쿠니 그림. 김명수 옮김. 비룡소. 에밀리 디킨슨과 이웃에 사는 소녀와의 만남 이야기. 작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아내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상상 속의 동화.
올가 그레벤니크 글, 그림. 정소은 옮김. 이야기장수. 우크라이나의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가 어느날 갑자기 러시아의 공습이 시작되고 지하실에 피신해서 지내다가 피난길에 오르는 길을 기록한 다이어리이다. 전쟁이 평범한 사람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에 대한, 결국 전쟁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짓밟고, 인간이 인간을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는 범죄일 뿐이라는 기록이다. 전쟁에 있어서는 그 어떤 명분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두려워 떨고 서로를 챙기고 모이고 남고 헤어지고 떠나보내고 떠나오는 이들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p.11 "내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빨려들지 않기 위해 뚜껑으로 막아놓았을 뿐이다." p.15 "나는 사람을 민족 소속으로 나누지 않는다. 민..
그랜트 스나이더 쓰고 그림. 홍한결 옮김. 윌북 내가 읽은 그랜트 스나이더의 두 번째 책이다. 거친 세상에서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삶의 기술. 첫 번째 책도 마음에 들었는데 두 번째 책도 너무 좋았다. 정말 너무 좋았다. 조그마한 네모 안에도 얼마나 넓은 세상을 담을 수 있는지. 좁은 내 마음도 얼마나 광대하게 뻗어갈 수 있는지. 밤마다 한 페이지씩 열어 본다면 한껏 누그러진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올해 축일에도 이런 저런 선물들을 받았다. 작고 소소해서 소중한 것들도 있고 너무 커서 고맙지만 마음 무거운 것들도 있고 여하튼 그렇다. 봉투에 잘 담겨서 오는 현금들은 수녀원 생활비로 직행하고 꽃다발들도 성당 앞에 잘 모셔진다. 물건들은 내게 필요한 건 내게 오고 아닌 것은 수녀원 공동장에 들어간다. 내가 주로 많이 받는 것을 문화상품권인데 아직 나를 파악하지 못하셨는지… 양산(내가 양산이라니 ㅎㅎㅎ)을 두 개나 받았다. 하하하. 마지막으로 깜찍하고 정성 가득한 손편지들은 내 책상 위에 오래오래 머문다. 올해는 좀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그래서 좋다거나 신난다는 뜻은 아니고 기분이 좀 묘했다. 크로스 센튜리2. 내 수도명까지 각인된 볼펜이다. 주임신부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인데 여지껏 이곳저곳 성당을 옮겨..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집요하게 계속되는 증언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감히, 지금 이 순간, 끔찍하기 그지없는 범죄의 집요함에 맞서겠는가?” (알베르 까뮈) 장 지글러가 말하는 유럽의 난민 이야기. 그가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 자격으로 유럽 난민을 받아들이는 ‘1차 접수 장소’ 중 하나인 레스보스섬 모리아에 방문하여 그곳의 실상을 기록한 책이다. 시인 사포의 고향인 ‘에메랄드 섬’이 잔혹하고 잔인한 섬으로 변해버렸음을, 그 섬에서 지옥을 맛보는 사람들도 ‘우리들’이고 지옥을 만들고 유지하는 사람들도 ‘우리’임을 기록했다. 작가의 다음 말이 이 책의 시작이요 결론이 아닐까. "올리브나무 숲의 텐트와 판잣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그와 똑같은 심란함에 사로잡혔다. 나 자신이 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