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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13,24-43 본문

마태오의 우물/마태오 13장

마태 13,24-43

하나 뿐인 마음 2013. 1. 13. 21:39

오늘은 여러 가지 비유가 많이 나오는 복음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 짧은 복음만 선택해서 아주 개인적인 묵상을 했다.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풀이와는 사뭇 다른, 그러나 지금 내게 필요한 묵상이었다. 병원을 다녀오고 나서 읽은 복음이라서 그런지 내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가르쳐주신다.

 

먼저 가라지를 뽑아 그러모아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모아들이라고 하련다.”(13,30)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 ‘저것이 아니다 싶으면 얼른 없애버리려 드는 것’(저 사람이 좀 아니다 싶으면 얼른 피해버리거나 무시해버리는 죄)을 부드럽게 말려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나 밀을 다치지 않게 하시고자 함께 자라도록 기다려주시는 하느님 마음보다 더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구절이다.

 

수녀원 와서 제대로 일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대충이라도 농사란 걸 지어봤다. 요즘 시기가 죽어라고 풀을 메어야 하는 철인데, 정말이지 눈 깜짝 할 새에 풀이 작물보다 웃자라나 그걸 뽑아댄다고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윤구병씨는 잡초가 없다고 하긴 했지만… 너무 재밌는 건(가끔은 섬뜩하다) 파밭에는 정말 파처럼 생긴 풀이 파보다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정구지(사투리의 여왕) 밭에는 정말 정구지 크기만큼의 풀이 자란다. 이 두 풀은 같은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밭에서 자라는지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교묘하게 속일만큼 비슷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쑥갓을 심어놓으면 쑥갓처럼 생긴 풀이 유독 거기서 자라고 깨밭에도 잎이 넓은, 얼른 보면 속을 정도의 개비름이 당당하게 깻잎을 제치고 자라난다. 향기마저 헷갈려 어떤 때는 뿌리를 들여다봐야지(개비름은 아랫부분이 붉은색이다) 구분이 될 때도 있다. 수도생활도 하나의 밭이다. 내 마음 밭에도 마치 거룩한 의향인양 내 선한 의지들과 함께 자라는 어두운 욕구들이 있다. 조금이라도 성찰을 게을리 하게 되면 나 자신도 얼른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감쪽같이 선한 탈을 쓰고 욕구가 자라난다. 시간을 조금난 지체하면 풀들이 더 단단하게 뿌리는 내리기 때문에 뽑아버리는 것이 곤란해지곤 한다. 마음밭도 마찬가지. 힘들여 뽑다보면 맥없이 작물들도 함께 뽑혀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 때 얼마나 가슴이 싸아~한지는 농사를 지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래서 파밭이나 깨밭 같은 경우는 아예 한꺼번에 막 뽑아서 깨만 골라내어 다시 심기도 한다. 이렇게 완전히 수확할 때가 되어 작물들이 튼튼히 자라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줄곧 풀들이 골칫거리이다.

 

문제는 ‘먼저’(30절)라는 단어였다. 지금은 조심조심 풀을 뽑고 작물을 키워야하는 시기이지만, 추수 때는 어떤가? 추수 때가 되면 먼저 밀을 뽑아 곳간 가득 채워 넣고 풀만 남은 밭은 갈아엎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왜이러시나… 왜 ‘먼저’ ‘가라지’를 뽑아 그러모아서 그것도 ‘단으로 묶어’ ‘태워버린다’ 하시는가? 순서가 뒤바뀐 게 아닌가요, 예수님? 아님, 농사에 대해 잘 모르시는 건… 아닌가요?(본래 조금 아는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필요 없어 뵈는 것, 그동안 참고 참았으니 뵈기 싫어 얼른 내다버리고 싶은 것이 가라지인가? 내 마음밭에는 없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는 내 어두운 부분들이 가라지인가? 처음부터 주어진 자연스러운 나의 한부분이건만 맘에 들지 않아 내 것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 나의 일부들이 가라지인가? 이상을 꿈꾸는 성격, 예민함, 그다지 좋지 않은 건강, 나를 둘러싼 조건들, 때론 내 이웃들까지도, 심지어 내게 주신 십자가마저도 가라지로 치부하고 싶은 나. 수도생활에는 좋은 것, 이상적인 것들만 있었으면 좋겠고(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이지) 나라는 인간도 한점 티 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했으면 좋겠고…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예수님은 먼저 가라지를 뽑으라 하신다. 그것도 그냥 뽑아서 대충 던져버리지 않고 그러모아서 단으로 묶으라 하신다. 보기 싫은 것도 내 일부임을, 그냥 던져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정리하라는 것. 내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부정적 감정까지도 내팽개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하나씩 끄집어내어 눈앞에 두고(直面) 객관적으로 정리해 보라는 것. 그런 뒤 ‘태워버려라’. 번제(燔祭)이다. 하느님 앞에 온전히 살라 봉헌하는 것. 하느님께서는 버젓한 밀(좋은씨)만 받으시는 게 아니라 내 부족한 허물마저도 받으신다. 하느님은 아시는 것이다. 밀만 수확한 후 풀밭을 그대로 엎어버리면 내년에 또 다른 풀이 자라나 말썽을 일으킨다는 것을. 내 안의 어두움과도 직면하여 정리한 뒤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드리지 않으면 그 감정들은 억압되어 언젠가는 내 삶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말썽을 일으킨다는 것을. 그래서 먼저 가라지를 뽑게 하시고 단으로 묶어 태우게 하신다. 그것도 천사의 도움(39절; 추수꾼은 천사들입니다)으로 하신다. 완성된 좋은 작품(밀)보다 내 허물(가라지)을 기꺼이 ‘먼저’ 받으신다. 그런 후 밀은 또 다른 열매를 위하여 당신 곳간에 모아들이신다. 나의 장래마저도 미리 보시고 아껴주시는 하느님. 허물도 마다 않으시고 내 좋은 점을 당신 곳간에 채우시는 하느님.

 

수련소 4년 동안 참 많은 후회를 하면서 살았다. 왜 이리 내가 못났는지 나한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모든 걸 바쳐드리고자 선택한 삶인데 지지리도 못난 내 모습만 보여드리게 되고, 하느님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 나도 사랑할려고 선택한 삶이 내 자신 사랑하기에 급급했으니. 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못난 나를 하느님이 부르셨구나. 게다가 내가 얼마나 못됐고 심술쟁이이고 가련한 영혼인지를 깨달은 후, 바쳐드릴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 순간. 그것도 서원을 앞두고 내가 빈털터리임을 깨달았으니. 근데 그제야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드리겠다고 성당에 필사적으로 앉아있을 때보다 아무것도 없음을 알면서도 초라한 내 모습 감추지 않고 그냥 그렇게 감실 앞에 조용히 머무를 때, 그때 비로소 기도하는 마음도 편안해졌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던가. 가난서원의 내적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지금도 자꾸만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하고 뭔가를 봉헌하고자 두리번거리는 내게 하느님은 일러주신다. “아서라, 가라지를 뽑아 그러모으다가 밀까지 함께 뽑아버릴라.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내 추수의 시기는 내가 알지 못한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시간. 내가 추수되는 시간. 그때까지 하느님은 기다리신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요한 18,9)하신 예수님 말씀이 떠오른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이 세상 모두를 하나도 잃지 않고자 하신 예수님.

 

병원에 다녀왔는데, 체질마저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나의 일부임을 자꾸 부정하고 싶었다. 왜 이런가 싶었지. 그것도 욕심이더라.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보다 수도원에서 폐 끼치지 않고 당당하고 싶은 내 욕심.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강했으면 하는 욕심.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의 위치에 있고 싶은 내 욕심.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의 약함도 내 육신의 약함도 모조리 그리고 기꺼이 받으신다. 의탁하는 마음을 청하게 하는 복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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