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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13,1-23 본문

마태오의 우물/마태오 13장

마태 13,1-23

하나 뿐인 마음 2013. 1. 13. 21:41

성서본문 그대로 나누어서 정리.

-비유(13,1-9)

-이유(13,10-17)

-풀이(13,18-23)

 

여러 번 읽어 내려가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돌밭’이었다. 그 다음 것은 비유에서는(1-9절) 수동태(뿌려진)가 쓰이다가 풀이(18-23절)에서는 능동태가 대부분이라는 차이였다. 풀이를 ‘새겨들으시오’(18절)하신 말씀이 마음에 함께 들어왔다.

사실 이 복음은 우리들을 수도 없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복음이다. 달콤한 위로가 아니라 자각과 반성과 도전을 주기 때문에. 역시나 어떤 수녀님은 ‘내 뜻과 관계없이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뿌려졌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하는 물음 때문에 깊이깊이 고민하며 묵상하더군. 나 역시 그런 의문을 안고 있다. 돌밭, 길가, 가시덤불 같았던 과거 또는 현재 때문에 위의 질문을 수도 없이 하느님께 던지곤 했었지. 질문을 가슴에 그대로 둔 채 복음으로 돌아가 본다, 일단은.

먼저 수동태(떨어졌다)와 능동태(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듣자 기꺼이 맞아들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고, 듣기는 하지만...등등)의 차이. 비유만 보면 운명처럼 보이지만, 풀이를 자세히 듣다보면 능동형 즉, 내 몫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운명론자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별 수고 없이 한탄만 하며 세월을 흘려보내고 싶을 때가 많았기에 풀이 부분에 능동태가 많다는 사실이 와 닿았나 보다.

하지만 13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하시니, 받은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곧 귀가 없거나 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깨닫는 마음이 없는 탓일 것이다. 15절에 “마음으로 깨달아”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함께 떠오르는 묵시록의 말씀.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 그도 나와 함께 만찬을 나눌 것이다.”(묵시 3,19-20) 두드리시지만 열지는 않으시는 예수님. 눈과 귀는 주시지만 듣고 보고 그것을 토대로 깨닫는 것은 내 몫이라는 뜻이리라. 보고 들음은 문을 여는 행위일 테고 깨달음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만찬일 테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니 “지금 보고 있는 그대들의 눈은 복됩니다! 지금 듣고 있는 그대들의 귀는 복됩니다!”라는 말씀이 반갑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내 마음밭은 어쩔 것인가? 길가에 뿌려진 것은 옮겨 심고 흙이 부족하면 채우고 가시덤불은 치우며, 두드리시는, 끊임없이 내 문 앞에서 두드리시는 분에 대한 믿음을 지닌 채로…. 그래, 씨뿌리는 사람이 어디 씨만 뿌리랴? 씨뿌리는 그분이 절대 씨만 뿌리실 분이 아님을 알지 않는가. 길가(아, 내 발목을 한참이나 붙잡고 놓지 않았던 바르티매오! 길가에 앉았던 그가 무슨 행동을 했었던가?), 흙, 가시덤불, 좋은 땅… 이 모두가 우리의 삶이다. 어느 것 하나 없어서는 인생이 완성되지 않는다.

이 중 ‘돌밭’이라는 단어가 내내 눈길을 끈다. 흙이 많지 않은 돌밭. 흙이란 무엇인가. 썩음, 겸손, 나의 本質, 내 존재 그 자체. 흙을 부정한다함은 곧 자신을 부정함이요, 뿌리를 내릴 수 없음이다. 하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억지로 고개를 쳐들거나 발돋움을 할 게 아니라 아래로 뻗어야한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런 역설을 살아내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래로 뻗는다 함은 어린이가 되는 것이요,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요, 낮아지는 것,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고 종이 되는 것이요,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는 것(필립 2,7-8)이리라. 그때야 하느님이 지극히 높여주시니(필립 2,9) 이것이 바로 하늘로 나아가는 것! 역설이 진리로 드러남이여.

돌밭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얕긴 하나 흙으로 덮여 있고 곧 싹이 돋아나기(5절) 때문이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겉으로 멀쩡하게 가난한 수도복 차려입고 입으로는 하느님 얘기를 하고 수도원에서 살며 어느 정도의 열성을 지닌 채 ‘말씀을 듣자 곧 기꺼이 맞아들이기’(20절)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에 ‘한때뿐’(21절)이다. 한때뿐이라는 단어가 참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 단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수도자가 몇이나 될까...

한때뿐’이지 않기 위해 오늘도 이렇게 노력중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포기, 내 자신을 잊음… 이 모두가 ‘한때뿐’이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부족한 자신이지만 끊임없이 나를 드리며 아차 싶더라도 얼른 예수님 이름 부르며 마음으로 감실을 향해 내달린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비유와 풀이 사이에 이유가 끼어 있기에 풀이가 더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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