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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13,18-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본문
새겨들어라...라는 말에서 시선이 멈춰서 다음으로 잘 넘어가지지 않았다. 채 다 읽기도 전에 뭔가 미진한 느낌. 지금의 내가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지금까지의 이 복음은 내가 지금 무슨 밭인가를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길 위이기도 하고, 돌밭일 때도 가시덤불일 때도 있었다. 자신있게 나 자신이 상태를 좋은 땅이라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하지만 늘 당시의 나 자신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 복음이다. 더불어 어떤 밭에 떨어지든 실망치 않고 씨를 뿌리시는 분에 대한 묵상도 종종.
그런데 오늘은, 원해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사람더러 어쩌라는 건지요...라는 의문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의문을 처음 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나로 치자면 그리 잘한 게 없으니 대들지 못하겠지만, 마음 좋고 성실한 사람들이 자꾸만 길가로 돌밭으로 가시덤불로 내밀리는 이 세상을 어쩌실 건가요 정도는 내가 줄기차게 물어도 되지 않을까 해서다.
성당에 앉아 복음을 읽고 또 읽었다. 눈을 감고 답을 기다리고, 또 눈을 뜨고 읽고, 다시 마음을 가라앉혀 응답이 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부분들.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 빼앗아 간다'(19절),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21절),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1절),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22절). 깨닫지 못한 건, 환난이나 박해에 걸려 넘어진 건, 말씀을 듣고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넘어간 건 바로 '나의 선택'이 아니었던가. 깨닫지 못하고 환난이나 박해에 걸려 넘어지고 말씀을 듣고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메마른 길이 되고 완고한 돌밭이 되고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되어간 것은 아닌가. 좋은 땅일 때도 깨닫지 못하고 환난이나 박해에 걸려 넘어지고 말씀을 듣고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또 아닌가.
이쯤에서 다시 들리는 소리는, '새겨들어라'.
이제 내가 나 자신에게 묻는다. 정말 길 위에 떨어져서 깨닫지 못했던가. 정말 돌밭이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환난이나 박해에 걸려 넘어졌던가. 정말 가시덤불이어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그리 쉽게 넘어갔던가. 그러니까 하느님 탓인가, 내 탓인가. 헛된 공명심에 차서 괜히 남을 대신해서 묻겠다 마음 먹었다가 내 보잘것없이 가난한 마음가짐만 훤히 들여다봤다.
묵상의 마지막은 씨 뿌리는 이였다. 씨 뿌리는 이가 수확 만을 생각했다면 좋은 땅을 골랐을 테지만, 좋은 땅만을 선택하지 않고 씨를 뿌린 이유는 뭘까. 키울 마음 없이 씨만 뿌리는 이가 어디 있겠나. 누가 애써서 그렇게 씨를 낭비한단 말인가. 또한 씨 뿌리는 이도, 뿌려지는 땅도 씨(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즉, 씨 뿌리는 이도, 씨가 뿌려지는 땅도 씨(사람) 탓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않는다. 그러니 새겨들어라.
좋은 땅에 뿌려졌을 때 난 무엇을 했던가 생각해 본다. 그래,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면, 마음 좋고 성실한 사람들이 자꾸만 길가로 돌밭으로 가시덤불로 내밀리는 일이 자꾸만 생기지 않도록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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