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우리의 판단을 뒤흔드는 복음에 관하여 본문

로완 윌리엄스 지음. 민경찬, 손승우 옮김. 비아.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재판 장면을 톺아보며 각각의 의미를(결국은 하나의 의미를) 묵상하도록 이끄는 책.
내가 만들어내는 예수. 아무리 좋은 의미라고 해도 그것은 예수를 세상에, 이 비좁은 내 안에 가두는 일일 뿐.
내년 사순절 초반에 한 번 더 읽어야겠다.
p.12
"우리가 무언가를 참고 견뎌야 한다는 사실은 올바른 삶을 발견하는 과정,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p.27
"마르코가 그린 예수는 마치 아둔한 음치들에게 기본적인 화음을 설명하려 애쓰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음악가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변혁하는 힘이 자신에게서 나와 치유가 일어날 때도 예수는 황급히 사람들에게 이를 발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 일에 대해 입을 여는 순간 곧바로 이는 왜곡되고, 잘못 이해될 뿐임을 아는 듯 말이지요. 그리하여 예수는 어떤 지체함도 없이 '곧바로' 전진합니다. 그렇게, 자신과 함께 있는 그 누구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고 헤아리지도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p.38 ~ p.39
"마르코가 쓴 예수의 법정 이야기는 힘과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심판을 내립니다. 그가 그린 심판대에 선 예수 이야기의 핵심부에 있는 이 낯선 순간을 지나쳐버린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을 잘못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 가장 높고 고귀한 존재,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그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중'에서 가장 현명한 분, 가장 거룩한 분, 가장 신령한 분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이해는 하느님의 성취를 곧바로 '우리'의 성공과 동일시하고, 하느님의 지배를 곧바로 '우리'의 지배와 동일시하는 섣부르고 잘못된 생각을 낳습니다. 이 세계의 실패, 우리의 실패가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이 계시지 않음을 가리킨다고 믿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p.40
"마르코는 이 세상의 성공이나 결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 때,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가장 분명하게 보고 들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p.44
"하느님은 어떤 성공을 보장해주는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폭력적인 세계의 방식을 거부하는 이들이 자신이 하는 낯선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도록 확실한 설명을 제시하는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그러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을 다시금 이 세계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세상 마지막 날 다른 모든 세력을 압도할 힘을 지닌 일종의 '경쟁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p.50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의 활동이 갈보리에서 끝났다고 마르코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임을 비밀로 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를 여러 치유자,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에 완강하게 맞섰습니다. 예수가 이 세계에 가져 온 가능성은 저런 것들과 견줄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실로 이 세계가 나아가는 길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그러한 변화는 단순히 인간이 처한 상태를 개선한 정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p.52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는 행위와 하느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사람이 '쓸모없음'을, 아무런 유익도 없음'을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마르코의 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p.53
"미래는 지금 이 순간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 방점을 두는 태도는 현재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태도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더 악화되면 자신이 믿는 미래를 바탕으로 다른 누군가가 겪고 있는 가혹한 현재를 부정하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종교의 역사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발견되는 문제입니 다. 부패한 종교 권력자들은 아주 교활하게 이러한 태도를 조장합니다."
p.54
"심판대에 선 예수가 한 말은 "너희는 곧 내가 옳음을 알게 될 것이다. 판세는 역전될 것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이 세계를 심판하러 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순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공동체의 투쟁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p.55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지금 이 순간' 교회의 모습에서 눈을 돌려 (미래의, 그렇기에 실재하지 않는)'더 나은' 교회를 향해 우리의 열정과 상상력을 쏟아붓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 곧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있는 곳, 몸부림치지만 늘 실패하는 공동체가 있는 곳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사람의 아들이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p.55
"‘진보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은 (지금 쌓여 있는) 모든 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고 정화된 미래를 좇고, '보수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은 (지금보다) 신실하고 타협 없던 과거로 눈을 돌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복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현실에 집중하기를 요구합니다. 이 현실은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우리의 배경으로, 그리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현실은 온갖 추문으로 얼룩져 있고 고통스럽습니다."
p.56
"동방 교회 예식서에 따르면 성찬례를 통해 우리가 기리는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곧 그분이 이루셨던 과거와 그분이 이뤄내실 미래가 모두 담긴 존재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가 성찬례를 드릴 때 그분의 십자가, 그분의 빈 무덤,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은 모두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견하든, 신비는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p.56
"어떤 그리스도교인이든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을 감내하는 일입니다. 현실이 좋다거나 이러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억지로 위장하지 않은 채 그저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 존 던John Donne의 말을 빌리면 "이 낮고 하찮은 땅에"서 우리를 만나고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말이지요. 이 만남은 기쁨으로 가득 찬 만남일 수도 있지만, 두렵고 끔찍한 만남일 수도 있습니다."
p.57
"기도는 몸과 마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도외시한 채, 그러한 것들에서 철저히 벗어나 자신을 추상화한 다음 다른 어딘가, 경건과 거룩함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멈추어 서서 기도한다는 것은 인내를 가지고 자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주의를 기울니는 데서 시작됩니다."
p.59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이의 증인이 되어갈 때, 그의 ‘쓸모없음’을 되새기고 그를 따라 ‘쓸모없어질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진정 예수가 누구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p.59
"우리 자신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는 노력에서 벗어날 때, 어떻게든 안정감을 얻고자 하려는 움직임을 멈출 때,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자신이 세운 기준을 들이대어 모든 것의 이치를 따지는 과정을 중단할 때, 그리하여 온전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알든 모르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마르코의 예수가 이 세계를 향해 내린 판결을."
p.64
"마르코와 달리 마태오는 예수가 예언자들이 약속했던 대로 하느님의 영이 그를 통해 온전히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데 관심을 기울입니다(12,28).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 때문에 지금 여기서 알려지는 것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p.65
"마태오는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단서를 찾아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파편으로 보이는 것에서 전체를 봅니다."
p.67 ~ p.68
"우리는 마태오 족보를 통해 인간을 둘러싼 추문이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활동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이라는 가부장적 질서가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중단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말이지요. (상상력이 모자란 독자들에 게는 이런 해석이 버겁게 다가갈 수도 있겠지만) 심지어는 마태오가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려고 이 족보 이야기 전체를 가지고 농담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족보가 아닙니다. 마리아의 자식은 하느님의 자식이지, 다윗의 자손 요셉의 자식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우리가 읽는 법을 알았다면, 이 가족사는 우리가 하느님의 역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하는 이야기로 기능했을 것입니다."
p.79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겪는 문제는 다른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기보다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어떻게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들로 인해 불안에 휩싸이고 이에 괴로워하는 우리 자신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p.81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렸던 것과 같은, 우리 자신에 대한 말끔한 상과 그럴싸한 설명에 대한 기대는 접은 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알아주시니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는 것을 주시리라는 소망을 품고 기다려야 합니다."
p.83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리 언어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멈추어 서게 하는 것, 달리 말하면, 우리 안에 깊이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철저하게 뒤집어엎을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p.91
"십자가가 그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럴싸한 방법이라면, 십자가가 그저 인간의 고통을 추상화한 상징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십자가에 주목하는 것이 그저 고통에 매료되게 하기 때문이라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십자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설사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집단,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로 공모한 집단이 십자가를 자신들의 증표로 삼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예수의 십자가라 할 수는 없습니다."
p.93 ~ p.94
"지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것을 포기하는 데, 기존에 갖고 있던 앎을 내려놓는 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예수의 삶을 통해 드러난 지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겪는 고통, 인간들이 마주한 위협에 노출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 안에서, 이 지혜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고통과 위협을 견디고 어떻게든 그가 보여준 자기 비움을 따라야 합니다."
p.95
"지혜는 인간 삶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인간에게 건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인정할 때만, 자기 스스로를 강하게 여기게 하는, 그래서 안정을 주는 모든 거짓 위안을 거부할 때만 생명의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맞출 수 있습니다."
p.96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고 등 떠미는 세상,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는데 성 공이 달려 있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혜는 언제나 유배자, 난민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첫 번째로 할 일은 희생당한 이의 관점"The intelligence of the victim을 갖는 것입니다." 희생당한 이의 관점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희생자가 되는 것이 그 자체로 선하거나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생당한 이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힘을 추구하는 체제에서 배제된 이들의 관 점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우리가 힘을 가져야 한다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희생자는 힘을 추구하는 이 세계의 질서가 자신의 할 일을 마친 후에 내팽개친 이, 버린 이를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희생자는 그 존재 자체로, 자기야말로 인간의 필요와 문제에 포괄적인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념, 제도, 체제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희생자의 편에 섬으로써 우리 또한 그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p.101
"루가의 복음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 밖의 누구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쓴 복음서입니다. 첫 번째 장에서부터 루가는 세상의 중심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 그리고 경계를 짓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p.102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박탈당한 이들을 뜻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이란 사람들이 기대를 접은 이들, 혹은 별다른 기 대를 하지 않는 이들, 사람들의 시선에서 배제된 이들, 사람들이 애써 찾지 않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분명하게 살아 숨 쉬고 있으나 사람들 눈에 띄는 분명한 입지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권력자들, 권력을 추구하는 세계를 꾸짖고 물리치시는 하느님이 이들을 높이십니다."
p.105
"큰 잔치에 관한 비유는 마태오의 복음서에도 나오지만, 마태오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가 초대받았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 루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이 사회에서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비유는 예수가 잔치를 베풀 때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을 만한 사람들은 초대하지 말라고 말한 직후에 나옵니다(루가 14:12~14)."
p.107 ~ p.108
"마르코는 외로이 이 세상에 저항할 때, 쓸 만하고 유익한 결과를 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향해 결단할 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루가는 한발 더 나아가 담대히 말합니다. 하느님의 초월은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 세상에 영향을 미칠 힘을 갖지 못한 이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최소한의 권리마저 모두 박탈당한 이들에게서 드러난다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윤리적으로 선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순교자들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하신 이유는 순전히 그들이 이 사회에서 잉여 인간 취급당하는, 찌꺼기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p.110
"‘배제된 이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그림으로써 루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어느 현대 작가는 하느님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연결을 이루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루가의 복음서가 이야기 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p.112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의미 있는 노력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은 자신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옳고 당연하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 방식을 따를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기 십상입니다."
p.114
"소통하기 위해서는 듣는 이도 노력해야 한다. ‘내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왜 이 사람은 이토록 심각하게 여길까?’라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p.115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각 사람이 가진 고유의 이야기에 주의 깊게, 열심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전하는 모든 불완전성입니다. 여기에, 침묵과 틈으로 가득 찬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기획도 들어맞지 않는, 어떤 결론도 도출해내지 않는 삶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p.117
"우리는 장애가 있는 이들을 어린이를 보호하듯 보호해야 한다는, 이들은 평범한 성인으로 성숙할 수 있게 해주는 위험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p.125
"대화란 내가 타자로 인해 변화될 수도 있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대화가 유일한 길인 이유는 대화를 통해 우리가 타자와 동일해지지는 않지만 그 타자와 함께 더 커다란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p.125
"우리가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희생당한 이의 관점”을 갖추어야 한다면, 이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할 때 우리가 속한 제도와 체계에서 배제된 이들의 눈으로 이 세상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이를 넘어서 내부자도 외부자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이해를 향해 함께 성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p.128
"그리스도교인들은 무력한 사람들을 자신의 시야에서 몰아내는 삶을 살면 안 됩니다. 그들의 존재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p.131 ~ p.132
"앞서 우리는 마르코가 그린 재판 장면, 예수가 빚어내는 차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거의 모든 언어가 하느님을 포 착해 내는 데 실패함을 성찰해 본 바 있습니다. 이 법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생각하지는 않는지, 우리가 의미 있고 쓸모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공급해주는 이로 하느님을 격하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심문을 받게 됩니다. 또한 마태오가 그린 재판 장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실함, 우리가 사용하는 유창한 신앙의 언어들이 하느님의 지혜를 얼마나 가로막는지를 조사하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머무르는 제도, 체계를 만들면서 누구를 찌꺼기 취급하는지, 누구를 배제하는지를 묻습니다. 루가는 더 나아가 우리가 찌꺼기 취급하는 이들, 우리가 배제한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할 뿐 아니라 우리가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그들의 모습(가난과 소외)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발견하라고 말합니다. 성전의 세리,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의 집에 찾아온 여인,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배제되고 죄책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모두 우리 안에 있습니다."
p.138 ~ p.139
"요한의 복음서에서 반복해서 나타는 주제는 자신이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혹은 진실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빛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식, 약속의 자식, 선택받는 백성으로 규정하지만 정작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신뢰하지도 않으며 그처럼 살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의 복음서는 근본적으로 ‘내부자’에게 도전합니다."
p.145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예수가 사는 곳에 함께 머무는 삶을 뜻합니다. 고별 담화에는 머지않아 예수가 받게 될 고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있는 곳에 머무르려 한다면 예수의 무력함과 죽음까지도 함께해야 합니다. 예수가 경멸받을 때 그의 친구들, 그를 따르는 이들 역시 경멸받을 것입니다."
p.146
"진리 안에 머무는 삶은 이러한 죽음에서 도망치기를 포기하는 것, 신앙이 전혀 우리를 위험으로 내몰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위험은 문자 그대로 박해받을 위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위험뿐만 아니라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느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하면서도 하느님을 길들이는 삶의 방식을 모두 포기할 위험까지를 포함합니다."
p.151
"우리 자신이 지키려 하는 것, 고수하려 하는 것을 하느님의 뜻과 동일시할수록 우리의 명분과 하느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생깁니다. 우리의 열망과 두려움을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는 말과 뒤섞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p.163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시시각각 발생하는 정보들에 관해 알면 알수록 현실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현재와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리라고 스스로 둘러대기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p.167 ~ p.168
"각 복음서는 고유의 방식으로 우리가 심판하는 곳에서 내려와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받는 곳에 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마르코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증인으로 홀로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태오는 놀라우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소외시키는 전문 지식, 종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가는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만들어 놓은 문밖에 있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라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우리에게 우리가 속할 '왕국'을 결정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세계'에서 살지(자신을 선물로 주시는 창조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에서 살지, 창조주의 대척점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세계,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거부와 경쟁을 부추기는 세계에서 살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p.169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단순히 그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이나 그가 이룬 기적들에 기초한 확신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이 중 어느 쪽도 아닙니다. 신앙은 삶의 중심을 우리 자신에게서 예수에게로 옮기기를 요구합니다. 복음서의 재판 이야기는 우리가 이를 이룰 수 있도록 돕습니다."
p.180 ~ p.181
"순교자들에게 중요했던 권력은 생명을 주는 힘이지, 명령을 내리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기에, 순교자들은 소름 끼칠 정도의 위협과 고통 가운데서도 에수를 향한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명령한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었음을, 진리 안에 머무는 삶이 지닌 깊이를 깨닫게 되었음을, 예수의 삶에서 새롭고도 깊은 자신의 자리를 찾았음을, 예수가 선 곳에 자기 또한 서게 되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p.190
"초기에 수도 생활을 했던 이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동기가 왜곡되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경계했음을, 진정한 신앙의 시험은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이루어짐을 끊임없이 상기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수도 공동체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p.190 ~ p.191
"다른 어딘가로 가서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충동, 답변 없는 기도에 대한 깊은 좌절, 어떠한 기쁨과 사랑의 체험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의 연속,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점수 매기려는 충동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종종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다양한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상황··· 사막 교부와 교모들은 이 모든것을 수도 생활에 따르는 ‘시험’으로 (때로는 풍자와 짓궂은 농담을 곁들여)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웅주의를 내세우는 글들을 비틀고 비판하는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가 순교와 같은 극적인 체험을 동경할 때 일종의 해독제 역할을 해줍니다."
p.192 ~ p.193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려는 열망에 휩싸이면, 우리는 이러한 가상의 극에서 자신의 미덕, 용기, 혹은 지혜를 과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역할 을 떠맡으려 합니다. 그리고 갈등(시험)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이 서 있는 곳과 겁먹고 경멸당하고 있는 이들이 서 있는 곳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으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의 환대는 거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열망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눈으로 상황을 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자신을 최대한 ‘탈중심화’de-centering해서 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p.231 ~ p.232
"마르코의 복음서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가 가져다주는 위안입니다. 마르코는 하느님이 결국에는 우리가 세운 이론과 기대에 따라 움직이리라는 오만함, 그분의 초월이 실제로는 인간이 세운 우선순위와 그들이 이해하는 희망과 욕망을 건드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심판대에 세웁니다. 마태오가 이야기하려는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하느님의 지혜가 현실에 가져다주는 충격을 거부한 채 자신의 지혜에 기대 위안을 얻으려는 성향,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종교적 언어와 종교적 행동을 통달하여 피아식별을 하려는 경향이 심판대에 서야 할 진정한 피고인이라고 말합니다. 루가는 낯선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누구의 목소리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오만하게 재단하며 스스로를 ‘내부인’으로 여 김으로써 안정과 위안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이러한 논의들을 더 확장해, 우리의 의지와 망상으로 세워진 세계에 맞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세계, 우리가 집으로 여겨 이와 함께 그 안에 머물도록 부름받은 세계를 제시합니다. 이로써 그는 우리가 실제로 있는 세계에 있지 않으려는 경향, 우리가 다스리는 세계에 머물러 위안을 얻는 경향을 심판대에 세웁니다."
p.239 ~ p.240
"심판대에 선 예수와 만날 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기꺼이 침묵을 감내하는 것, 곧 예수의 침묵이 우리를 사로잡게 하고 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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