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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성호경을 긋듯 오르간을 친다 본문

하루하루 부르심따라

성호경을 긋듯 오르간을 친다

하나 뿐인 마음 2023. 9. 20. 12:05

사실, 오르간이 좀 버거운 날에는 반주 없이 좀 노래하거나 미사곡을 말로 해도 큰일나는 건 아니지 않나 혼자 중얼거리기도 한다. 내가 모든 미사에 들어갈 순 없으니 다른 반주자가 못 오는데 내가 나가는 미사가 아닐 때나 피정이나 휴가로 며칠씩 자리를 비울 때 한두 번 정도는 반주가 없어도 되지 않나 했다. 피정 들어와 첫 주일미사에, 연로하신 수녀님들이 대부분인데 오르간 음에 맞춰 노래하는 것이 서로를 너무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반주자 공백을 메웠고 피정 동안 음이 좀 맞지 않아도 주일과 대축일 미사를 창미사로 봉헌했다. 그리고 오늘 이 부분을 읽었다.

"어느 날, 신암동에 있는 육군 제1병원 안달원 베드로 군종신부가 병원 성당의 주일미사 오르간 반주를 해줄 수녀를 요청하러 공평동 분원을 찾아왔다. 오트마라 수녀는 안토니오의원 책임자인 박정덕 골룸바 수녀를 적임자로 보고 파견하기로 했다. 안달원 신부는 매 주일 운전병을 보내어 지프차로 이동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박 골룸바 수녀가 오트마라 수녀와 함께 오르간을 반주하려 신암동 육군 제1병원으로 가던 첫날이었다. 두 수녀의 눈에 신암 성당 종탑 높이 모셔진 대형 파티마 성모상이 들어왔다. 공평동 분원에서는 안토니오의원 앞마당에 모셔진 파티마 성모님께 ‘수녀원 건축 대지를 찾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고 있었다. 성당 종탑에서 파티마 성모님이 대구 시내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이었다. 파티마 성모님과의 이 반가운 만남을 통해 오트마라 수녀와 박 골룸바 수녀는 성모님께 수녀원 건축 대지를 꼭 찾을 수 있도록 아들 예수님께 부탁해 달라는 기도부터 올렸다. 그리고 독일로 귀환한 수녀들이 한국으로 다시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두 수녀는 ‘예수님은 당신 어머니의 부탁을 꼭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매 주일 육군 제1병원 미사 후에 그렇게 기도했다.
오트마라 수녀와 박 룸륨바 수녀가 수녀원 부지를 찾기 위해 외출하던 날이었다. 도중에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두 수녀는 잠시 어느 집 처마 아래에 대피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바로 그 집은 교우가 운영하는 의원으로, 파티마병원에 많은 도움을 준 임학권 루카 선생의 집이었다. 소낙비가 그칠 때까지 두 수녀에게서 우리 수녀원의 사정을 들은 임 의원장은 신암동에 수녀원 건축 대지로 합당한 넓고 좋은 땅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지주는 경건한 교우 김우정 토마로서 그는 땅을 교회에 기부할 의향도 있었다. 온 집안이 신암 성당에 다녔다. 신암 성당은 종탑에 모셔져 있는 파티마 성모님께 오트마라 수녀와 박 골룸바 수녀가 육군 제1병원에 갈 때마다 바라보며 기도드린 곳이 아닌가! 수녀들은 이를 하느님의 섭리라 믿고 빠른 응답을 주신 성모님께 감사드렸다. 임 의원장은 당장 지주를 만나 계약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수녀들과 상의해야 하고 총원의 재가 및 대금 준비 등의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어 일단 미루었다. 그리고 모든 수녀들이 함께 땅을 둘러보고 의논한 후, 적극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신암동 건축부지 매입이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건 이 글을 읽고 처음 알았다. 공평동에서 신암동까지 병원 성당 오르간 반주를 하러 가지 않았다면 파티마 성모상을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갑자기 내린 소낙비, 우연히 비를 피한 어느 집의 처마 아래, 비가 내리는 동안 사정을 들은 집 주인, 가까운 본당 교우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이야기… 누군가의 요청에 자신을 내려놓고 시간과 노력을 봉헌하려는 마음을 먹었기에 우리 공동체의 첫 본원 건축이 이렇게 시작될 수 있었다. 오르간 반주 봉사가 이 모든 기도의 시작 성호경이었구나 싶어, 괜히 혼자 숙연해졌다. 내게 주어지는 이 작은 일에 매일매일 성호경을 긋듯 정성을 다해야겠다.

(그러나 현실은 긴장과 고단함으로 피정 중인데도 혓바늘이 돋고 입안이 좀 헐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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