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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요한 20,19-23 어쩌면 복수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는 것까지가 우리의 일 (가해 성령 강림 대축일 레지오 훈화) 본문

요한의 우물/요한 20장

요한 20,19-23 어쩌면 복수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는 것까지가 우리의 일 (가해 성령 강림 대축일 레지오 훈화)

하나 뿐인 마음 2023. 5. 28. 16:38
Peace of The Holy Spirit - Pentecost 2010 by Stephen B Whatley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신 후 오히려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사흘 전 참담한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신 분이,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제자들이 떠나가는 비통한 배반을 당하신 분이,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기쁨으로 채워주시며(20절) 하셨던 말씀,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분의 표정과 목소리는 어땠을까요. 자신의 평화가 아니라 제자들의 평화를 비는 예수님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번 주 복음은 잘 보여줍니다. 
 
  오늘은 성령을 주신 후 하셨던 말씀 중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말이지만, 참으로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의미상으로 ‘그대로 두다’는 ‘용서하다’의 반대로 볼 수 있는데, 요한 복음사가는 의도적으로 ‘용서하다’의 반대말-용서하지 않는다? 복수하다? 갚아주다?-을 사용하는 대신, ‘그대로 두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올해 성령강림 대축일 복음에서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 제게 크게 와 닿았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보시기에, '용서하다'의 반대말(용서하지 않다, 되갚아 주다, 복수하다 등)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져야할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에 '용서하다'는 말은 있어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은 없기를 바라시기에 발음조차 하지 않으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로 두다’(크라테오)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류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아픈 배신도 있고, 되돌려주고 싶은 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있다는 걸 아시지만 그 용서하지 않는 마음, 되갚아 주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 남기는 상처는 더 크고 깊다는 것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둔다'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겠다 마음 먹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께 미뤄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지 말고, 당장은 어려우니 용서를 미루는 것까지만 하도록 말입니다. 정작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사람들을, 모든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마지막 순간 뒤돌아선 제자들마저도 용서하셨습니다. 
 
  크라테테(그대로 두면)는 접속법 현재형 동사이고, 케크라텐타이(그대로 남아 있을 것)는 직설법 완료 수동태(지속적 효력)입니다. '그대로 두다'의 시제가 죄가 그대로 지속되는 것을 드러내는 현재형인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물론 지속적 효력을 드러내는 직설법 완료 수동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척 냉엄하게 들리지만 해결할 수 없는,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은 주님께 유보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심판하는 권한이 아니라 용서하는 권한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그대로 두는 것까지가 사람의 일!) 사적 복수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어야 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복음서 곳곳에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벳자타 못가의 병자(5장), 간음한 여인(8장), 사마리아 여인(4장)... 모두 용서로 새로운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분이 사람을 다시 새롭게 살게 하시는 데에는 ‘용서’라는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며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씀과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은, 그분이 우리를 파견하면서 주신 중요한 임무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서로를 살리면서 하늘 나라로 함께 가는 것.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고, 또 받은 성령의 은혜를 잘 간직하면서 끊임 없이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한 주간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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