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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하느님과 별 본문

雜食性 人間

하느님과 별

하나 뿐인 마음 2021. 1. 31. 10:43

크리스토프 게르하르트 지음. 김혜진 옮김. 분도출판사.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는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한다.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넓혀나가면 나갈수록 하느님을 '알게' 되었던 사람들. 신비롭고 오묘한 우주 속에서 만난 하느님 이야기.

 

요 근래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야. 내가 찾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길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게 아닐까.' 하지만 아직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은 이 말이 큰 따옴표가 아니라 작은 따옴표 안에 있다. 언젠가 이 문장을 완성해서 상대 의견에 대한 반대, 혹은 실망, 좌절을 안겨주는 말이 아니라 응원이 되도록 하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마음 먹은 바다. 


"창조 이야기는 자연과학 논문처럼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성 요소, 그 요소들의 기원, 하느님과 인간 존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말 그대로 성령의 이끄심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내게 성령은 존재에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불어넣고 존재 안에 머무르는 역동적인 힘이다."

"하늘을 관찰하여 결정되는 것이 시간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땅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별의 도움을 받았다. 따라서 외부의 위치를 정함으로써 내적 방향을 설정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영적 지평과 관련해서 ‘언제, 어디에서, 어디로’와 같은 질문도 제기되었다."

"자연과학적 천문학과 신앙이 수백 년 전에 서로 다른 길로 갈라지긴 했지만, 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연구하는 천문학자도 연구가 끝난 후 그 연구 결과가 인간으로서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한다."

"자연과학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과학과 신앙의 방법과 영역은 전적으로 각자의 일이다."

"우리 인간이 실재 자체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거나 인식하기를 원하지 않을 때, 실재의 깊은 차원을 놓쳐 버린다. 시야가 좁아지고 다른 것을 배제해 버린다. 그러다 보면 결국 다른 것들은 절대 인정할 수 없고 그러므로 다른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는 근본주의에 이른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성경에서 다른 역할도 한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고난이나 전쟁 중에 ‘주님의 날’의 사자使者로 해석된다. “해는 어둠으로, 달은 피로”(요엘 3,4) 바뀔 것이며 별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온 창조 세계가, 또한 하늘의 창조 세계가 가난한 이들과 멸시받는 그분의 백성을 위해 하느님이 곧 개입하시리라는 것을 알려 준다. 온갖 불행 속에서, 고난과 재앙의 징후 속에서 해와 달 그리고 별은 하느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마련하시고자 하는 임박한 구원의 표징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위협적인 표징, 예를 들어 일식과 월식 또는 수천 개의 유성이 떨어지는 유성 폭풍우 같은 것은 믿는 이들에게 재앙의 징조가 아니라 구원의 표징이 된다."

"한 해의 중요한 날들을 특정하는 것이 천문학자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수도자에게도 중요했다. 나날의 일정을 믿음으로 채우기 위해 정확한 시간에 시간전례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

"하늘이 청명할 때 시간을 알아내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야간의 시간을 결정하기 위해 밤에 별을 관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 사용하기 위해 훗날 태양이나 별들을 이용해 거듭 보완된 간단한 모래시계나 물시계가 있었다."

"수도원에는 연중 시간의 변화를 알고 있는 형제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전례 일정을 정할 수 있었다. 기도하기 위해 낮과 밤의 시간을 계산하고 알려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야 수도 형제들이 정확한 시간에 성무일도를 할 수 있었다."

 

"기도 시간은 우주의 운행을 살피며 그에 따라 정해졌다. 아침기도는 동틀 무렵 올려지고 그에 따라 아침미사 시작 시간이 정해졌다. 창조의 리듬이 수도자들의 기도 생활에 반영되어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동쪽을 향해 기도했다. 이는 특별한 방법으로 행해졌다. 성당의 중심축은 성당의 수호성인 축일의 일출 방향에 따랐다. 특히 중세에는 일출 방향을 향해 성당을 짓기 위해 전문 천문학자들이 필요했다."

"주교이자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교부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과 자연에 대한 지식은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연구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자연과학과 신앙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신앙은 자연과학의 합리적 통찰을 필요로 하고, 과학은 신앙을 통해 더 깊은 의미를 얻는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 경전을 근거로 내세워 비신자들에게 잘못된 주장을 펼치고, 상대방이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로 하늘을 뒤죽박죽 만들어 말하는 것처럼 당황스럽고 위험하며 가장 심각한 것은 없다."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천문학 연구는 깊은 종교적 의미가 있다. 창조주는 천문학자들과 자연을 알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을 통해 찬양받으신다. 그는 천문학자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참사제라고 생각했고, 천문학으로 자연이라는 책을 열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했다."

"“나는 특별히 세 가지, 즉 궤도들의 수와 크기 그리고 운동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이 세가지가 왜 그러한지, 다른 방식으로는 될 수 없는지 알고자 했다. 내가 이것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정지해 있는 것들, 즉 태양과 항성들과 매개 공간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놀랍도록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해 있는 것들이 이렇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움직이는 것들 또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요하네스 케플러)"

"‘움직이는 것’은 행성과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것들이다. ‘정지해 이는 것’은 태양과 항성들이다. 이 정지해 있는 것을 요한네스 케플러는 삼위이신 창조자 하느님에 비유한다.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는 것처럼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 성자는 우주의 바깥 경계를 형성하는 항성에 비유된다. 성령은 움직이는 것들 사이의 공간을 연결한다."

"당시 로마에서 갈릴레오만이 유일하게 태양중심설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가르멜회 사제 파올로 안토니오 포스카리니는 1615년에 세바스티아노 판토네 가르멜회 총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다는 것이 성경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사실 재판 과정에서 갈릴레오에게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전통 종교와 철학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태동하는 자연과학 사이에서 중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정치만이 재판을 지배했다. 그럼에도 지식인들뿐 아니라 가톨릭 내에서도 갈리레오와 케플러 그리고 코페르니쿠스가 계속 읽히고 연구되었다."

"달은 우리 태양계의 초기 단계에서 생겨났다. 어떤 큰 물체가 아직 이글거리는 액체 상태인 지구와 충돌하여 탄생했다. 지구에서 다시 우주로 날아간 물질이 현재의 달이 되었다. 그 이후 지구와 함께 태양 주위를 여행하고 있다."

"지구는 약 50억 년 전에 태양으로 인해 탄생했다. 태양은 우리 은하계에 존재하는 수백만 개의 별 중 하나로 특별하게 크거나 작지 않은 평범한 별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구의 궤도와 크기가 비슷한 경우다. 이 궤도와 크기가 수십억 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생명의 출현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 특이한 점은 밤하늘의 동반자 달이다. 달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지구 궤도를 안정화시킨다. 달이 없다면 지구는 태양 주위를 비틀거리며 돌 것이다. 달이 지구 궤도를 매우 안정되게 유지시켜 준다."

"생명 자체가 지구의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구가 어떻게 수십억 년 동안 점액질 상태를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처음의 물리와 화학에서 생명을 필연적으로 탄생하게 했는가! 그리고 오늘날 지구상에서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적인 생물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모든 저항을 이기고 이 일이 일어났다. 결국 이 지구 어느 구석에도 살아 있는 유기체가 없는 곳은 없다. 온 땅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

"우주의 진화에서는 정말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우주의 진화에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도달해야 할 목표가 주어졌다. 하느님은 그 진화에 동행하고 이를 이끄는 시작이자 완성이다."

"성경의 저자는 자연과학적 과정에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인간이 반복적으로 한 경험과 그로부터 얻어 낸 지식을 묘사한다. 바로 하느님과 인간, 창조자와 피조물, 인간들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피조물의 관계를 묘사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본질,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오늘날의 표준 모델과 진화론은 사실관계를 주제로 삼고 물리적 원인과 영향에 대해 묻는 이론이다. 반면, 성경은 사물과 인간의 본질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다룬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창조’하신다. 성경이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은 자연과학적 이론의 일부가 아니며, 그분의 행위가 자연법칙을 벗어나 행해질 수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분의 행위는 가시적인 세계를 초월하며, 눈으로 볼 수 있으며 측정 가능하고 예상 가능한 모든 것 이전에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형태로 우주가 발전할 수 있었던 어떤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의 전제다. 따라서 성경은 또는 창조 설화는 하느님의 위대함과 그분 행위가 세상 창조의 근원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신자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앞세우며 그러한 주제에 관해 사리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어 비신자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창피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 수치는 단지 무지한 개인이 조롱받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믿음의 울타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신성한 성경 저자들 역시 그렇게 무식하다고 생각하게 한다.”(성 아우구스티노)"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30억 살이 넘었으며 놀랍고도 매력적인 방식으로 발전한 세상에 대한 관점과 이 세상의 창조주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연결하는 것이다. 특히 진화론은 신앙의 관점에서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와 연결될 수 있다. 창조는 끊임없이 진보한다. 그 창조 안에서 창조주가 현존하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창조 행위가 신자들에게 위협적으로 표현되었다면, 오늘날의 우주론을 통해서 신자들은 창조 행위를 더욱 깊고 다채롭게 이해하게 된다."

"하느님의 인간적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너무 작게 생각하곤 한다. 자연과학과 그 지식은 하느님에 대해 더 큰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라고 계속 등을 떠민다. "

"근본주의는 과학뿐 아니라 신앙에도 해를 끼친다. 과학과 신앙의 관점 둘 다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진리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을 방해하고, 인간에게 하나의 통로를 통해서 일면적으로 보라고 강요한다. 현실이 얼마나 넓고 깊고 다채로운지를 무시한다. 더 나아가면 이러한 다양성을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성공할 경우 완전히 박멸한다."

"‘누가 또는 무엇이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나? 어떤 것은 왜 있고, 없는 것은 왜 없는가? 백뱅의 시작에 무엇이 또는 누가 있었는가? 그 전에는 무엇이었나?’ 이 모든 것은 자연과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우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인간 삶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질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무시하거나 떨쳐 버릴 수 없다."

"카를 라너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신의 피조물에 자기 초월(자기 개발, 자기 극복)의 가능성을 심어 주셨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자신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에도 이 능력을 부어하셨다. 스스로 진화하는 우주에 대한 자연과학적 이론은 신앙에 통합될 뿐 아니라 신앙을 본질적으로 더욱 깊게 한다."

"천문학에서 배웠듯이 지구 탄생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낮은 확률에서 탄생했고 그래서 참으로 소중하다. 지구의 생명이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자연과학으로 인해 우리 인간에게 맡겨졌다. 우리 삶이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의 삶과 조화를 이루고, 우리 이익을 위해 피조물을 일방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우리가 맡은 책임을 올바르게 행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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