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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렛 어스 드림 본문

雜食性 人間

렛 어스 드림

하나 뿐인 마음 2021. 1. 25. 08:53

프란치스코 교황. 21세기북스.

 

교황님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 사랑은 누구의 사랑을 닮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책이다. 마치 하느님처럼, 예수님처럼, 교황의 사랑은 온 인류를 향해 있었고 그 지고한 사랑의 첫발을 그리스도인들이 떼어주기를 온맘으로 바라고 있었다. 아니, 외치고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데 온 인류가, 심지어 세상에 환멸을 가져오는 이들마저도 그의 품'안'에 있었다. 우리가 쉽게 적으로 간주한 이들,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굳이 손잡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 돌이킬 수 없는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까지 모두, 팔을 안으로 굽혀 보듬고 다독이고 안아주어야 하는 이들이었다, 교황님에게는. 이론과 현실이 일치하도록, 하늘과 땅이 하나이도록, 기도와 삶이 하나이도록 하는 사람. 이를 혼자 하지 않고, 앞설테니 함께 하자고 외치는 사람. 또 한 번 내가 친 울타리를 부수는 시간이었다. 

 

엉망진창 진흙탕에 소낙비까지 쏟아지는데, 비를 피하지 않고 앞서가는 교황님이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 분인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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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을 모순으로 보는 현상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떼어 놓는 열등한 사고방식의 결과입니다. 악령, 즉 대화와 형제애를 약화시키는 갈등의 영이 대립을 모순으로 바꿔놓으며, 현실을 단순히 둘로 갈라놓고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데올로기와 파렴치한 정치인들이 습관적으로 행하는 못된 짓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합니다. 위기를 맞으면 사람들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위기로 인한 고통에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하느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신 거야. 그래서 그런 거라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하느님의 창조를 고정된 것으로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지금도 진행되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가 끝난 후 우리가 예전보다 덜 이기적인 존재로 성장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타인과 세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운동입니다. 친절하게 행동하고 믿음을 견지하며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원대한 삶의 목적이며, 그런 삶을 위해서는 용기와 기백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윤리를 조롱하는 번지르르한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현 시대에는 지금까지 평등과 자유를 강력히 강조해왔지만, 앞으로 닥칠 문제에 맞서려면 이제는 똑같은 정도로 강력하게 형제애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애가 더해질 때 자유와 평등도 우리 사회에서 그 존재를 적절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현실을 회피하는 세 가지 파멸적인 태도에 대해 경고하고 싶습니다. 이런 파멸적 태도는 결국에는 우리의 성장과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 더 나아가 성령의 행위까지 방해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 세 가지 태도는 나르시시즘, 낙심, 비관주의입니다."

"낙심하면 우리는 비탄에 빠지고, 모든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게 됩니다. 따라서 주변을 더는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제안하는 것도 제대로 듣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만 몰두할 뿐입니다. 낙심은 영적인 삶을 슬픔으로 몰아갑니다. 슬픔은 안에서부터 우리를 갉아먹는 벌레입니다. 따라서 낙심은 결국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어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또 다른 팬데믹, 즉 무관심이란 바이러스가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무관심은 끊임없는 외면의 결과이며, 즉각적이고 마법적인 해결책은 없으니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뇐 결과이기도 합니다."

"부자에게 라자로의 불행은 라자로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무관심의 심연 너머로 그를 지켜보며 “가엾어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겁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상황을 알았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무관심과 우리의 생각 사이에 틈새가 생기는 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감정이입 없이, 즉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상황을 판단합니다."

"적잖은 이탈리아 사람이 삻을 헤쳐 나가려면 건전한 정도의 ‘메네프레기스모menefreghismo(무관심)’가 필요하다고도 주장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빠짐없이 걱정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마음 편히 살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결국 영혼을 철갑으로 둘러쌉니다. 다시 말하면, 무관심이 영혼의 방탄복 역할을 합니다. 어떤 것도 영혼에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나옵니다. 무관심이 일상이 되어 우리의 생활과 가치 판단에 소리 없이 스며들면,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무관심에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미리 준비되고 깔끔하게 포장된 대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주님이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리라는 걸 굳게 믿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겸손히 하느님 앞에 내려놓고 도움을 간구할 때 범람이 일어납니다. 이 단계를 ‘영의 식별’이라 부릅니다. 이때 하느님에게 속한 것과 하느님의 뜻을 방해하려는 것에 대해 알게 됩니다."

"영을 식별한다는 것은 성급한 결정으로 고통을 조금이나마 경감하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 앞에 다양한 선택안을 기꺼이 내려놓고 범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할 때 타협을 통한 절충적인 해결은 없습니다. 타협은 일시적인 해결이고, 하느님의 뜻을 간구하며 적절한 시기에 통찰력 있는 식별력으로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유보를 뜻합니다."

"권력자들의 죄는 거의 언제나 ‘그럴 만한 특권을 지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죄’입니다. 달리 말하면, 수치심도 없고 놀라울 정도로 파렴치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범하는 죄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특권 의식’은 곧 교권주의라는 암 덩어리이며, 우리 성직자들에게 맡겨진 소명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도착증입니다."

"진정한 역사가 있으려면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가 부끄럽더라도 이미 지나온 길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기억하는 사람이고,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도 우리가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내가 이런 역사를 기억하자고 말하는 이유는 과거의 압제자들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니라, 억압받은 사람들의 증언과 위대한 영혼에 영광을 돌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나의 무고함을 주장하겠다고 다른 사람의 죄를 거론할 때는 큰 위험을 따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사랑으로 빚어낸 피조물이란 것을 깨달을 때 얻는 내적인 안녕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인간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 깨달음은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창조한 것을 존중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이용하지 않아야 할 것을 이용하고, 결코 착취하지 말아야 할 대상에게서 재물이나 권력 혹은 만족감을 얻어내는 것도 죄입니다. 사랑에 필요한 한계를 거부하는 것도 죄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멈춤’의 시간은 변화와 회심을 도모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누구에게나 ‘멈춤’의 순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순간이 없었다면 언젠가는 겪게 될 것입니다."

"대교황 그레고리오 성인께서는 <욥기 주해>에서 은총을 잃은 타락에 대해 설명하며 “약한 사람이 많은 칭찬을 받으면 복 받은 사람이 ‘된 것’을 기뻐하지 않고, 복 받은 사람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은 점점 더 박수갈채를 갈구하며 “그의 행동이 하느님 안에서 칭찬받을 만했던 만큼,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나는 값싼 위로를 피하는 게 중요하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병문안을 이유로 찾아와, 나에게 앞으로 괜찮아질 거라고, 지금은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다시 그렇게 아프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좋았지만 내 마음에는 결코 와닿지 않는 멍청하고 공허한 말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 생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우선적 선택을 통해 주님은 가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판단 기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연대성의 개념이 왜곡되지 않기 위해서는 보조성이 더해져야 합니다. 보조성은 자기 운명의 주체로서 타인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선의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이 변화의 주체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또 그들과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지만 점점 굵어지고 매번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미래를 꿈꾸고 싶다면, 조직의 원리로 개인주의보다 형제애를 선택해야 마땅합니다. 형제애, 서로에게 속해 있고, 인류 전체에 속해 있다는 감정은 공유의 가능성을 두고 협력하며 함께 일하게 해주는 주춧돌입니다."

"과열된 소비지상주의는 연대감을 깨뜨립니다. 소비지상주의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우리는 자기보존에 연연합니다. 포퓰리즘 정책들이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을 탐하고, 그로 인해 우리의 두려움은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가 어떤 세계를 조사하더라도 악령이 내게 속한 몸에서 영적으로 빠져나와, 온갖 의혹과 추정을 내세우며 나를 개인적인 관심사와 관점에 가두려고 하는 유혹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그 유혹이 어떻게 우리는 사면초가에 몰려 불평을 일삼으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는 자로 바꿔놓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자아에서 빠져나와 더 큰 것의 일부가 되라는 권유를 받으면, 의심과 억측의 악령이 우리에게 자신의 애착심을 비밀리에 감추며, 다른 사람들의 잘못으로 정당화하는 온갖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알려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애착을 정당화해주는 ‘변명거리’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 마음은 강퍅해지며 그 변명거리에 집착하고, 결국 그 변명거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분열의 씨는 이렇게 뿌려집니다.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자애로운 마음이 자신의 생각이 우월하다는 집착으로 대체됩니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는 파벌들 간의 다툼으로 하나됨이 훼손됩니다."

"교회에 ‘불순물’이 너무 많다고 주장하며, 이런저런 순수주의자들이나 전통주의자들만이 신뢰받을 만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에 분열의 씨를 뿌립니다. 이런 현상도 영성의 세속화라 할 수 있습니다."

"악마는 거짓말로 유혹하는 게 아닙니다. 반쪽 진실 혹은 영적인 기잔을 상실한 진실이 사람들의 친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더 효과가 있습니다."

"‘자신의 낮춤’은 잘못을 고백하는 겸손한 행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 단죄하면,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씌우는 똑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낮춤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의존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의 은총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한계를 탓하지 않고, 나의 태도에서 잘못이나 결함을 찾으려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형제나 자매의 결함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가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찾아낸 후에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확신하며 자책할 때, 우리 안의 악령이 발 디딜 곳을 잃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주된 원인은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그런 견해들 뒤에 숨은 악령입니다. 그 악령은 비난과 맞비난의 악순환에도 숨어 있습니다."

"나를 내 형제자매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나와 그들의 교만과 우월감이듯이,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결함이며, 우리와 하느님 간의 상호신뢰, 또 우리 사이의 상호신뢰입니다."

"타인의 비난은 결국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지만, 자책은 우리를 하느님에게로 인도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도 무죄하지 않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잘못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누구나 용서를 받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는 편협함에서 벗어납니다. "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악행을 범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외떨어진 양심으로 추락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로테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의심과 억측은 적의로 가득하기 때문에 영혼을 잠시도 평화롭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언어 폭력이 증가하는 현상은 허약해진 자아, 뿌리의 상실을 뜻합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안심하려면 상대의 신뢰성을 떨어뜨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옳다는 확신을 주는 이야기, 다른 사람들을 침묵시킬 만한 근거가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서라도 상대의 신뢰성을 떨어뜨려야 합니다. "

"독선에 빠진 사람들, 불안에 시달리며 모든 것을 통제하고 성급하게 화를 내며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사람들이 공공의 장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우리 사회는 더욱더 분열되고 파편화되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교회라고 전염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언어 폭력, 중상모략, 불필요한 잔혹성에서 악마의 동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동굴에는 들어가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비난자와는 토론하지도 말다툼하지도 마십시오. 말을 섞는다는 자체가 그의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지만, 그의 논리에서는 영들이 이성으로 변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악령에는 다른 수단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내쫓으십시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양극화라는 바이러스 숙주에서 숙주로 옮겨가지 못하면, 점차 사그라들어 사라질 것입니다."

"갈등은 실질적으로 대립에 불과한 것을 모순되는 것으로 보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대립은 긴장 관계에 있는 양극이 서로 밀쳐내는 상태를 뜻합니다. 지평과 한계, 지역과 세계, 부분과 전체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지만,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대립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모순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선과 악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선과 대응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

"악령이 대립 관계에 있는 양극단 간의 긴장을 허용하지 않고, 일종의 정체된 공존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주의나 ‘거짓 평화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평화주의’는 전적으로 어떤 형태의 갈등도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지키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긴장 자체가 부인되며 포기되기 때문에 어떤 해결책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화해자의 책무는 갈등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또 식별을 통해 의견 충돌의 표면적 이유 너머를 보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통합은 양극의 어느 쪽도 말살하지 않고, 양쪽 모두에서 좋은 것과 유효한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찾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공동 합의성의 접근 방식입니다. 팽팽하게 대치하며 전쟁을 선포하거나 상대를 꺾으려 하지 말고, 차이를 표현하고 들으며 상대를 억누르지 않고 함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을 무르익게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물론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인내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평화가 지속되려면 상대의 주장을 귀담아듣는 절차를 마련하고, 그것을 확고히 유지해야 합니다. 전쟁 무기가 아니라 함께 걷는 생산적인 긴장 관계를 통해 하나의 백성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경청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좋은 종이 되는 법을 아셨기 때문에 훌륭한 주인이 되셨습니다. "

"악령은 유혹하는 데 실패하면 분노에 찬 비난을 내뱉기 마련입니다. 악령은 자책하며 ‘자신’을 탓하는 법이 없습니다."

"시간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용기 있게 앞으로 전진하며, 식별을 통해 하나가 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찾아내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맑게 보여주는 현재의 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에 대응하여 우리가 백성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우리 기억을 되살리며, 우리 뿌리를 기억하는 데 적절히 행동하지 못했다는 말이 향후에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쇠락하더라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욕망,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 정의와 창조에 대한 관심, 가족과 축제를 향한 사랑과 같은 본원적인 가치를 끝까지 지키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트주의는 주님이 이 땅에 주었던 풍요로움을 축소하고 제한하며, 모두가 공유하는 선물이 아니라 소수가 차지하는 소유물로 전락시킵니다. 계몽된 엘리트도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 수준,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경멸한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런 환원주의에 시달리고 고통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하느님에 대한 소속감과 서로의 연대감을 더해주고 강화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며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위기의 시대에 떠맡아야 할 특별한 역할이 있다면, 그 백성에게 본연의 영혼을 일깨워주며 공동선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상기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지만 결코 개인주의자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애국심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섬기지만, 국가주의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존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친밀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워진 어떤 문화에서든 교회는 그곳 사람들,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과 희망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곳 사람들의 일부가 되어 그들과 함께 걸으며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할 것이므로 가부장적인 태도로 함부로 그들을 조직화하려고 나서서는 안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게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징후 중 하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우리가 하나의 백성에 속해 있다는 걸 망각하는 것”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주님과 이 땅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이 땅에 보내진 것입니다. "

"타인의 얼굴만이 우리 안에서 가장 좋은 면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갈등이 증가하는 원인은 대체로 불평등과 불공평에 있지만, 더 근원적인 원인은 너덜너덜 닳아 없어진 소속감에 있습니다. 원자화된 사회는 불평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결코 내적으로 평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형제애는 우리가 새롭게 되살여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종교적 신념이나 그와 유사한 신념은 세상을 독특하게 바라보는 통찰력을 줍니다. 그런 신념에서 선행이 시작되고, 사회 전체를 강하게 해줄 수 있는 신념, 예컨대 연대하고 봉사하겠다는 확신을 더해줍니다. 종교적 신념은 시장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는 화합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고용자나 소비자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자유방임적이고 시장중심적인 접근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뒤섞입니다. 노동이 존엄의 근원으로 여겨지기는커녕 생산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더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서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익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시장에 좋은 것이 사회에도 좋은 것이란 잘못된 믿음에 동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재화의 축적을 허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나 좋은 일자리와 주택, 교육과 건강을 누릴 수 있는 경제가 필요합니다."

"시장이 공동선을 위해 작동하게 하려면 법과 규제가 필요합니다. 자유시장은 압도적 다수, 특히 실질적으로는 어떤 선택권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

"연대성은 단순히 식탁에서 빵부스러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식탁에 모두가 앉을 공간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는 마음의 교감, 재화의 공유와 증대, 모두를 위한 모두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상대를 내려다봐도 괜찮은 유일한 때는 그를 일으켜주려고 손을 내밀 때입니다."

"우리 삶에서 돈을 중심에 둔다면 주변이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인간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환경이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탑은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에 둔다면 자비와 배려에서 새로운 논리가 형성될 것이고, 그때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 적절한 곳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에는 만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이웃, 특히 곤경에 빠진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민자의 종교적 믿음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스도교 문화를 더럽힐 것이란 두려움에 살려고 발버둥치는 이민자를 거부하는 행위는 그리스도교의 문화를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한다면서 낯선 사람일지라도 곤경에 빠진 사람을 환영하지 않고,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특성을 내버린 채 허울뿐인 그리스도교 문화를 권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지적인 엘리트 집단이 되려는 오랜 유혹에 굴복한 교회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조직화하는 것은 교회의 책무가 아닙니다. 교회의 책무는 조직화하려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며, 그들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에게 하느님의 친밀함을 보여주시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 체하며 자기 합리화에 연연하는 사고방식을 나무라셨습니다. "

"점잖고 조용한 폭력으로 변하기에 충분한 무관심"

"부패의 위험은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민중 운동의 대의와 형식에 동참하려면 겸손함과 개인적인 금욕이 필요합니다. 그 길은 봉사의 길이지, 권력으로 향하는 길이 아닙니다."

"무력감과 분노를 자극하고, 갈등과 불만을 끝없이 유발하며, 구체적이고 지역적인 행동보다 추상적인 개념과 구호에 집중하라는 유혹. "

"우리의 가장 큰 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는 봉사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를 통해 인간과 공동체의 존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놓습니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이 덜 소비하며 지구에게 치유할 시간을 허용하고, 배척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찾을 수 있도록 허용할 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완전히 엉뚱하게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노동자가 가치를 창출하는 게 분명하지만, 노동자는 기업에서 언제나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여겨집니다. 반면에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소수의 주주가 기업의 향방을 지배합니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정의도 편협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친인척을 돌보는 도우미나 전업주부, 혹은 사회사업에 참여한 자원봉사자의 일은 임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는 편협한 생각을 넘어서야 합니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노동 시장에서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노동자들을 가난의 덫에 옭아매는 고용 조건을 거부할 수 있는 존엄함을 노동자들에게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기본적으로 보장받고, 복지로 먹고사는 사람이란 오명을 떨쳐낼 것이고,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일자리가 증가하면서 직업 간의 이동도 더 쉬워질 것입니다.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정책이 시행되면, 사람들은 돈을 벌면서도 개인적인 시간을 공동체에 넉넉히 할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중심의 어디쯤에 있는지 알고 싶다면, 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문과 창문을 열고 저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틀을 깨고 나와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집에 돌아옵니다. 따라서 순례자에게는 집도 더 이상 같은 곳이 아닙니다. 지금은 순례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읽으십시오. 여러분의 내면에 귀담아듣는 공간을 마련하십시오. 마음을 열고... 중심에서 벗어나... 초월하십시오. 그리고 행동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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