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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천 개의 파랑 본문

雜食性 人間

천 개의 파랑

하나 뿐인 마음 2021. 1. 2. 16:45

천선란 장편소설. 허블.

코로나 시대 두 번째 미사 중단. 지난 부활대축일에 이어 성탄대축일 미사마저 신자들과 함께 본당에서 드릴 수가 없었다. 쫓겨나는 것도 아닌데 당장 필요한 것들만 챙겨 본원으로 들어왔고, 장엄하게 드리는 본원 성탄 밤미사에서조차 서글픔이 기쁨보다 컸다. 그리고 미사 중지는 오늘부로 다시 연장되었다. 근래 해맞이 하러 집을 떠난 사람들, 새벽에 문을 연다는 술집, 끝까지 대면 예배를 고집해 결국 단체 감염이 된 교회, 병상을 찾아 떠돌다 생을 마감한 환자들 등의 뉴스를 보며 절망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천 개의 파랑>은 절망에 고개 숙이고 못본 체 돌아서려는 나를 끝내 붙들어 세웠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것을 찾게 했고 나는 희망과 원망을 함께 품에 안았다.

콜리가 올려다 보았음직한 빛나는 하늘을 나도 올려다 본다. 눈부신 소설이었다.

"그날, 관중석이 꽉 찬 늦여름의 경기에서 콜리는 스스로 낙마했다. 투데이가 콜리의 무게를 힘겨워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로에 선 이상 투데이는 멈추지 못할 것이며 이 상태로 완주했다가는 영영 다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실격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콜리는 짧은 순간 완주해야 한다는 존재 이유와 투데이를 살려야 한다는 규칙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을 들여 후자를 선택했다. 투데이를 지켜야 한다."

"“왜 말을 타다가 하늘을 바라본 거야?”
“하늘이 그곳에서 그렇게 빛나는데 어떻게 바라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당신까지 위험해지는 데 왜 나를 구했어요?”
“3%였잖아요.”
“고작 3%인 거잖아요.”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꺼진다고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니까요. 3%라는 뜻은 말 그대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기계가 고장 난 것이라고 믿었던 보경은 곧 온몸이 작업복에 늘어붙은 채 질식해 죽은 소방관을 만났다. 오래된 소방복 탓이었다."

"시중에 유통되는 휴머노이드의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만연해지고 당연해지면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했다. 때때로 어떤 일들은, 만연해질수록 법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는 했다."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 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은혜가 그곳에 오래도록 있고 싶어서 있던 것은 아니다. 그 공간이 은혜가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을 뿐이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출전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투데이는 예전만큼 달릴 수가 없어. 그건 불가능이야, 은혜야. 투데이는 이미 충분히 네 마음을...”
“예전만큼 달리라는 말이 아니에요.”"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투데이를 다시 주로에 세우자는 콜리의 의견을 처음에는 모두가 반대했다. 달릴 수 없어 죽을 위기에 처한 투데이에게 또 달리라고 하는 것은 고문과도 같으리라.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만큼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콜리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결국 굴복했다. 투데이는 달릴 때 행복한 아이다. 태어나서 줄곧 주로를 달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 말은 결국 달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 동안 마방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관절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주로를 달리는 것이 투데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투데이는 주로에 서서도 뛰지 않는 훈련을 했다. 태어난 이후로 줄곧 빨리 달리는 훈련만을 받았던 투데이는 이제, 아주 천천히, 다치지 않을 만큼 느긋하게 달려야 했다. 투데이가 조금만 속력을 내려고 해도 옆에 서 있던 민주와 연재, 그리고 은혜가 손을 저으며 뛰지 말라고 투데이를 어르고 달랬다. 천천히, 느리게, 여유 있게, 느린 호흡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네 등에 타고 있는 콜리의 움직임을 함께 느끼면서...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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