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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 본문

雜食性 人間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

하나 뿐인 마음 2021. 1. 2. 10:34

 

 

게르하르트 로핑크 지음. 김혁태 옮김. 생활성서.

오랜 만에 떨리는 마음으로, 마음에 새겨가며 읽어 내려간 책. 아는 만큼, 살아낸 만큼 기도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리 길지 않은 이 기도를 내 생애를 통해 진실되이 바치고 싶다. 


"우리의 도덕적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복음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세상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하느님만이 당신 나라를 오게 하신다. 물론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먼저 회개하라. 그러면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신앙 고백도 아니고 통회의 기도도 아닌 청원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가 따로 없었을까?"

"주님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

"주님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제자들의 기도이다.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원의와 계획은 잊고, 오직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만을 바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 모든 청원의 마디마디 핵심을 이룬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에게 이 기도는 자신의 삶을 뒤흔드는 위험한 기도가 된다."

"시편에 익숙하신 예수님은 찬미, 감사, 탄원의 기도를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 본연의 고유한 기도로 주신 기도는 오롯한 청원 기도이다. 급박하게 외치는 청원 기도야말로 막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에 제대로 들어맞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왜 먼저 장황하게 거룩한 칭호들을 늘어놓지 않고 곧장 당면 문제로 들어가는가? 주님의 기도는 왜 그처럼 짧은가? 이 기도가 바로 제자들 무리로 이루어진 새 가족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 ‘아버지’가 유일한 칭호이다. 게다가 이마저도 가족 안에서 사용하는 칭호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기도하는 이와 하느님 사이의 대화를 지배하는 것은 왕궁의 격조 높은 의식이 아니다. 가족 내의 친숙함, 정확히 말해 예수님의 ‘새 가족’ 내의 친숙함이다. 가족 사이에서는 이리저리 에두르지 않고, 거창한 말들로 꾸미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정상적이라면, 가족은 서로 깊은 일치 가운데 이야기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협력을 원하시는 것도 그분의 자주성과 자유에 속한다. 그분께는 인간 없이 세상에서 행동하지 않으실 자유가 있다.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고,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도록 그분께 공간을 내드리는 이들을 찾으실 수 없다면, 하느님께서도 행동에 나서지 않으실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의 세 청원은 어찌하여 간접화법으로 에둘러 표현된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일 수밖에 없다. 곧 그러한 간접화법의 표현은 행동의 주체가 누구인지 열린 채로 두기 위해서이다. 이는 특히 첫 번째 청원의 수동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곧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에서 행동의 주체는 하느님 자신일 수도 있고, 또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하고, 둘 다 맞다. 이러한 이중성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게 분명하다. 하느님 몸소 당신 이름을 거룩히 빛내셔야 한다. 하느님 몸소 당신 나라를 오게 하셔야 한다. 하느님 몸소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셔야 한다. 이것이 우선적이고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제자들도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야 한다. 제자들 역시 하느님 나라에 공간을 내드려야 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

"주님의 기도를 시작하는 아버지αββα는 그저 우연히 들어간 칭호가 결코 아니다. 이는 혈육을 떠난 제자들이 새롭게 살아가는 새 가족의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는 칭호이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은 이제 전적으로 새롭고도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여받았다. 이전에는 자신들의 친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이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신다. 제자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온전히 신뢰해도 된다."

"제자들은 긴 시간을 내다보며 앞서 대비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종말론적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긴박했고, 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일이 최우선이었으므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침마다, 그날 저녁에는 어디에서 지내게 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늘 오늘만을 살았다. 내다볼 수 있는 날은 그 다음날까지뿐이었다.

"주님의 기도 네 번째 청원은 순진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 청원은 소시민적인 배부름과 안락함을 간구하지 않는다. ‘모든 세상을 위한 빵’을 간구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이 청원에서 간구하는 것은, 가능한 한 세상 걱정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기 위한 충분한 힘과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제자들이, 온 세상이 당신을 사람의 아들 또는 하느님의 아들로 알게 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신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다니엘서가 약속한 대로 하느님의 새 사회가 오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이 세심한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신적 신비를, 그분이 바라셨고 그분이 당신 목숨을 바치셨던 바로 그것, 곧 하느님의 다스림과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오는 것이 예수님이 바라시고 이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그분의 제자인 우리가 간구해야 하는 하느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서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그 나라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만 찾을 수 있는 나라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폴르 왜곡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 나라는 여기 오늘 이미 시작되어 우리 한가운데 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나라는 그런 나라이다."

"‘깨어 있음’을 그저 세상 끝 날에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것을 대비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는 그 의미를 축소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복음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종말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이미 지금 우리 한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향해서도!"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간구하는 주님의 기도 두 번째 청원은 세상 종말이 오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곧 이 청원을 바칠 때, 우리는 우리의 옛 세상과 그 모든 권세가 끝장나기를 기도한다. 여태껏 우리는 그 권세들을 섬겼다. 이 청원을 바칠 때, 우리는 이제 하느님께서 이미 오늘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새 세상이 시작되기를 기도한다."

"신약 성경의 기준에 부합하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해,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주어진 교회 본연의 모습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우리의 ‘깨어 있음’은 온전히 바로 그런 방향이어야 한다. 쇄신된 교회를 추구하고 끊임없이 그런 교회를 모색할 때만, 성경에 맞갖은 방식으로 사람의 아들과 그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이미 영원으로부터 작정하신 구원 계획을 지금 땅에서도 이루시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의 기도 세 번째 청원은 직접적으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소서!”라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 뜻, 당신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한다. 주님의 기도가 이처럼 왜 간접화법을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서 밝혔다. 곧 행동의 주체를 열린 채로 두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주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는 주어로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을 협력자로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하느님께서는 땅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신다. 그리고 인간은 여기에 자신을 열고, 그 계획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니 “당신 뜻, 당신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소서!”라는 간접화법이 이에 적합하다."

"하느님의 뜻을 주로 인간 개인의 운명에만 한정하는 해석이나 설명은 그것이 아무리 언어적으로 완벽하고 내용적으로 올바르다 하더라도, 성경과 주님의 기도에 담긴 폭넓은 깊이와 숨결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사회적 질서가 올바르지 않으면, 성전의 찬란함이나 예배의 화려함은 광대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예언자들이 늘 거듭 강조하던 바이다. 예수님에게도 하느님 백성의 불화는 사회적 불의만큼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서로 화해하고 한마음이 되어 사는 것이야말로 그분에게는 모든 하느님 예배의 필수적 바탕이다."

"예수님의 확신에 따르면, 반목과 불화는 하느님 백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이를 끝내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탓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내편에서 서로 화해하기 위한 모든 노력과 조치를 다하지 않은 채, 하느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혐오하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당신에게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이 기쁨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기쁨이다.(마태 5,23 참조)"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
누가 잘못을 했는지 예수님은 관심이 없으시다. 이 문제는 의도적으로 열린 채로 두신다. 불화의 원인은 성전에서 막 예물을 바치려는 이가 아니라 집에 있는 어느 누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성전에서 예물을 바치려는 이가 화해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사태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 백성 특유의 신앙에서는, 흔들림 없는 단호함과 냉철함으로 끊임없이 말한다. 서로가 함께하는 삶을 가져 오지 않는 기도와 예물과 예배는 모두 소용없다고!"

"예물을 바치려다 말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 급히 발길을 돌리는 이는, 그렇게 쫓아 달려가 화해를 이루려는 자신의 시도가 열린 마음을 만나게 될지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반목하는 형제에게 그렇게 애써 달려가는 이는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된다."

"하느님은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악에 빠지도록 유혹하지도 않으신다. 그런 것은 악마가 하는 짓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뽑으신 이들을 일정한 상황 속으로 이끄실 수 있다. 이 상황은 악과, 그리고 유혹하는 악의 적나라한 힘과 맞서야 하는 상황이다."

"이 이야기(마태 4,1-11)는 무엇보다 하느님 백성의 근본적인 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믿는 이라면 누구나 부딪히게 되는 특수한 유혹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탈출Exodus을 감행하고, 신앙의 길에 들어선 이는 누구나 다른 이들보다 덜하지 않게, 아니 훨씬 더 많이 유혹을 받는다. 하느님 백성이 매번 거듭 겪게 되는 유혹은 사회의 통상적인 부도덕보다 한결 깊고 무겁다."

“사실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큰 매력도 거의 없다. 특히 자유를 박탈하는 도덕적 압력을 통해, 그리고 섬기기보다는 다스리고자 하는 종교적 권력을 통해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는 유혹이 그렇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결국 정말로 속 깊은 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김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곧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악마를 섬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러면서 심지어 하느님을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할 때, 선택과 소명은 깊은 내부에서 뒤집어진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 선포는 자기 과시가 되고,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봉사로 뒤바뀐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이 얼마나 좁고 무방비 상태인지, 부르심 받은 이의 믿음이 얼마나 빨리 자기 보전과 자기 과시로, 스스로 주인이 되는 자기 영광으로 전락하고 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성경의 유혹 이야기가 지닌 폭발성을 알아듣는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가 자신의 소명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섬기는 일에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유혹을 받는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우리 자신은 아니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에게도 가장 위험은 유혹은 언제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사명을 거슬러 밀고 나아간다. 공동체의 건설을 거슬러, 하느님 백성의 모임과 일치를 거슬러 대적한다. 그러한 유혹들은 희미하지만 언제나 그럴싸한 광채로 다가온다. 우리 역시 구별에 대한 하느님 백성의 지식에 기대지 않는다면, 그러한 유혹들을 이겨 내지 못한다. 성경과 교회 전통 안에 구별의 지식들이 보존되어 있다."

"유혹을 비껴갈 수 있는 제자는 없다. 그러한 유혹은 시험으로서 꼭 필요하기까지 하다. 이로써 믿음이 순수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하느님께 청해도 되고 또 청해야만 한다."

"용서하지 않고, 뻣뻣하고 거만하게 자신의 권리를 고집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소명에 거듭 불충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가로막는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백성의 위기가 아나고 무엇인가. 그러니 주님의 기도는 순전히 간청의 기도이고, 그러니 주님의 기도는 부르짖음으로 끝난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백성이 모이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님이 되시고, 나 자신의 개인적 계획의 성공이 아니라 하느님 계획의 성공을 위해 노심초사하기를 원한다.”

"세례를 받은 이는 누구나 이 기도를 바쳐도 된다.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달은 이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아는 이도 주님의 기도를 바쳐도 된다. 그 모두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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