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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상처 입은 그리스도와 섬기는 그리스도 본문
제36장은 병든 형제들에 관한 규칙이다. 이 장은 "모든 것에 앞서 모든 것 위에 병든 형제들을 돌보아야 한다."(RB 36,1)로 시작하는데 덧붙여 "그리스도께 하듯이"(RB 36,1) 그들을 섬기라고 하면서 성경 말씀까지 인용한다.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 바로 병든 형제를 돌보는 길이라는 뜻이리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섬김'이다. '돌봄'을 '섬김'의 태도로 할 때,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단락도 바꾸지 않고) 성인은 곧바로 "그러나 병자 자신들도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섬김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며, 자기를 섬기는 형제들을 지나친 요구로 근심시키지 말 것이다."(RB 36,4)라고 덧붙임으로써 병든 나를 상처 입은 그리스도처럼 대하는 형제들을 '섬기는 그리스도'처럼 대해야 함을 주지시킨다.
베네딕도 규칙서의 아름다운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양편 모두를 배려함'이 아닌가 싶다. 성인은 수도승들이 아픈 형제를 최선을 다해 돌보길 원하지만, 혹여나 아픈 형제의 무리한 요구로 근심할 수도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비단 이 장에서만이 아니다. 성규 곳곳에서 적게 필요한 사람과 많이 필요한 사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선배와 후배, 나가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 등 양편 모두를 배려하되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서로서로 배려하도록 이끈다. 성인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염두에 두어야 할 것과 특히 애써야 하는 점이 다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릴 적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부인의 말마저도 옳다고 했다는 황희 정승의 일화를 들을 때마다 늘 갸우뚱 했었다. 결국 본인만 옳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끝나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이 자꾸 들어서이다. 그런데 규칙서에서 이런 부분을 접할 때마다 정말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돌보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자세와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자세가 다름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분명 옳은 말이지만 다른 입장에서 그 말을 할 때 공격이 되기도 하고 합리화가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내가 할 말과 네가 할 말, 내가 취할 태도와 네가 취한 태도가 다름을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한다.
또한 섬기는 '그리스도'를 만날 땐 상처 입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입장의 동일함'이요, '인격적 존중'이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주는 '수도자'와 받는 '수도자'의 관계임을 인식할 때, '선'배 와 '후'배 뿐만이 아니라 먼저 시작한 '수도자'와 뒤따르는 '수도자'까지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보면 '당연함'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하는데 이 경험이 반복되는 수도생활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편협한 자아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양편 모두를 고려하는 사려깊은 태도는 베네딕도 성인이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하면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경험을 통해 터득한 태도였을 것이다. 나란히 서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나아가지만, 서로 마주보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있음을 알려주는 성규가 너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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