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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이렇게 레위인들은 증언판을 모신 성막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민수 1,53) #Tolle_Lege 본문

Tolle Lege

이렇게 레위인들은 증언판을 모신 성막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민수 1,53) #Tolle_Lege

하나 뿐인 마음 2017. 1. 28. 20:59


"너는 레위인들에게 증언판을 모신 성막과 모든 기물과 거기에 딸린 모든 물건을 맡겨라.

그들은 성막과 모든 기물을 날라야 하고, 성막을 보살피며 그 둘레에 진을 치고 살아야 한다.

성막을 옮겨 갈 때에 레위인들이 그것을 거두어 내려야 하고,

성막을 칠 때에도 레위인들이 그것을 세워야 한다.

...

이렇게 레위인들은 증언판을 모신 성막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민수 1,50-53)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으로 성경을 읽을 것이다. 나 역시 내 고유한 입장을 가지고 말씀 앞에 선다. 그래서일 테다. 민수기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난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성막과 모든 기물을 나르는 데 드는 노동과 주의, 별것 아닌 것 같은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도 내 손을 타야 한다는 사실, 성막 하나 치는데는 힘 좋고 뜻 선량한 사람들이 함께 하면 될 일일 텐데 왜 레위인들만이 그것을 해야 하는가 싶은 마음 속 불평 불만. 진영을 옮길 때마다 내 짐의 무게도 책임지면서 저 다양하고, 복잡하고, 성스러운 것들을 하나도 손상되지 않게 처음처럼 옮겨 가는 것이 얼마나 각별한 신경과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마음 속 생각들이 정말 복잡하게 엉켰다.


요 몇 년, 특히 요 근래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돌아서면 미사를 준비하고, 돌아서면 제의실을 정리하고 관리해야 하는 일.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처음 이곳에 와 지냈던 몇 달 동안에 비하면 아주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만, 가장 정신 차리고 보내야할 주일은 미사를 '차리고 돌아서서 치우고'를 하루 종일 반복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레지오까지 들어갈 짬을 낼 수 없고, 오후에 30분이라도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없는 날은 신경도 날카로워지고 미사에 집중하기도 어렵다. 잠시 성당에 앉아도 기도가 아니라 그저 아픈 다리와 따가운 눈과 어지러운 머리가 잠시 쉬도록 멈춰 있는 경우가 많다. 수건 한 장, 바느질 한 땀, 주름 하나도 내 손을 거쳐야 하고, 제병을 체크해서 채우고 초를 적당히 배분하여 교환하고 물병, 물잔까지 씻고 닦고...부끄럽지만 이런 일들은 나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 안에서 불쑥 불쑥 이기적 자애심이 고개를 들이밀 때면 내가 배움이 모자라나 실력이 모자라나 싶은, 세속적인 마음이 요동을 친다. 


선한 지향으로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가끔은 이렇게 드러나지 않고 작은 일마저도 봉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이렇게 드러나지 않고 작은 일이나 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 하는 마음, 솔직히 들기도 했다. 점심도 못먹고 쏟아진 물을 닦고 다시 채우고 촛농을 긁고 빨래를 하게 되는 날이면 혼자 제의실에서 울컥울컥 하기도 했던 순간. 그 모든 순간들이 민수기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꺼 번에 떠올라 조금 훌쩍인 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하느님이 레위인을 선택하신 이유, 하느님이 레위인에게 맡기신 그 일의 엄중함과 거룩함, 실력이 좋거나 그것을 해낼 만한 공이 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일을 위해 온전히 따로 떼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 따로 떼어진 사람은 그 삶 자체가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졌음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가장 작은 뒤치다꺼리까지 모두 나의 일이다. 바닥에 꿇어 앉아 하염 없이 촛농을 긁어내고 누군가 먹다 남긴 물잔을 씻는 일도 한낱 허드렛일이 아니라 성막을 지키는 일임을 기억하자. 나는 성막 안에 계신 하느님께만 봉헌된 사람이 아니라 그 성막에 와서 기도하고 그 성막 주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봉헌된 사람임을 기억하자. 나보다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나보다 더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나보다 더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헌된 사람임을 말이다. 


일부러 사진은, 방긋 웃음 지으면서 바닥을 쓸고 있는 마르타로 골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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