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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강론 본문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저에게 있어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버틸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말씀을 통해 생각하지 싶지 않은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보게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넘고 싶지 않은 이 부분을 넘고 나면 더 큰 위로가 찾아온다는 것을 저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첫 단어에서부터 발목이 잡혀 묵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따라오라는 초대에, 그것도 나 자신을 버려야 하고 날마다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 초대에는 ‘누구든지’ 응답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이 초대에 나는 과연 매일 매순간 기꺼이 응답하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내 안에서 끊임 없이 올라왔지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수녀가 되었지만, 수녀가 되기 전 아기때부터 성당을 다니고 있었지만 과연 나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 초대에 진정으로 응답을 할 마음이 얼마나 있었던가.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 만이 아니요 부활이요 생명이요 구원임을 나는 얼마나 이해하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나의 예수를 따랐던가.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예수를 따르고 계십니까.
오늘은 한국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순교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당하는 일이지요. 하지만 순교라는 단어 역시 저에겐 버겁고 꺼려지는 단어입니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한 수많은 행위 중에서 ‘순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과연. ‘고통’을 통한 신앙의 증거인 순교를.
전 십대와 이십대 때에 고통의 의미를 너무나 알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람을 맞춰 놓은 것처럼 수시로 고통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던 부모님과의 이별, 육이오를 겪고 북한에서 피난을 오고 일본에서 건너오고 하면서 가족을 잃고 죽음과도 싸우며 큰일을 겪을만큼 겪으신 분들인데, 그 이후엔 남한테 별 해코지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하게 성당에 다니며 자신들의 나머지 삶을 살던 분들이 왜 나를 두고 차례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셔야 했는지, 홀로 남은 제가 친척 분들의 사업 실패로 유산을 전부 잃은 후에는 선한 마음으로 도우려고 했던 나에게서 왜 하느님은 고통을 남기고 많은 것을 앗아가시는지,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인간에게 주시고 왜 죽음을 허락하셨는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택하신 방법이 꼭 고통스러운 죽음이어야 했는지를 알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따져 묻고 또 따져 물었던 욥처럼, 저는 고통의 의미를 찾아 헤맸습니다. 상실감, 억울함, 절멸감과 싸우며 고통에 관련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바오로 서점과 제일서적을 샅샅이 뒤졌지요.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교리 공부도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훌쩍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입회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20년 정도를 찾아 헤맨 이후 제가 알게 된 것은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십자가의 예수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통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녀원에 입회하고 몇 년후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다음날 있을 잔치 준비로 모두 바쁘고 피곤한 날이었는데, 다들 힘들테니 내가 아침준비라도 해야겠다 싶어 식빵을 썰다가 고기 써는 톱니에 왼쪽 손가락 끝이 조금 잘렸습니다. 처음엔 뭔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고 종이컵 하나정도의 피를 받았는데도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응급실에 갔더니 이식을 해야겠다면서 입원하라고 했고, 입원한 후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손가락 끝을 일주일 동안 오전 오후 핀셋으로 긁어대는 것, 이것이 치료였습니다. 이를 악물어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새어나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전 좀 독한 편이라 잘 울지도 않는데,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더라구요. 남을 돕기 위해 한 일인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낫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왜 나는 더 아파야 하는가. 정작 다친 순간보다 치료가 더 아팠습니다. 하지만 뒤돌아 보니, 낫기 위해 상처를 긁어대는 고통스러운 시간은 저에게 치료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좀더 멀리 보자면, 치유를 위한 과정이었던 거지요. 새살이 돋게하기 위해. 그 이후 고통을 바라보는 제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아프지않다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이 있다라는 거지요. 상실이라는 광야에서 꽤나 방황했던 저의 삶을 새로운 시각, 치유, 새살, 새 생명, 구원이라는 넓은 관점으로 되돌아보게 되었지요. 죽을 것 같은 고통과 시련도 더 넓은 시각,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는 ‘치유’‘구원’의 과정입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시련의 때가 오면, 고통 안에서 주님을 만나려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그 고통을 다시 바라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픕니다.
모든 순교 역사가 그렇지만 한국 교회의 순교 역사도 참으로 모진 시간이었습니다. 잡혀 온 교우들은 옥중에서도 쉬지 않고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무수한 고문과 매질의 고통, 굶주림을 견디어내다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응답한 순교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모든 것, 곧 육신이며 이름이며 살아온 일생의 내력 그 어느 것 하나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송두리째 바쳤습니다. 순교자는 예수님을 가장 잘 드러내보여준 사람입니다. 하늘나라 말고는 어떤 것도 욕심내지 않은 사람.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온전히 드러낸 사람. 처참한 모습으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웃음지을 수 있었던 사람.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시선을 돌렸던 사람.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던 사람.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짊어져야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는 법이지요.
김대건 신부님은 옥중에서 '자신은 젊기에 천주님을 위해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 너무나 젊은 그가 천주님을 위해 해야할 일이란 다름아닌, 그 순간에 '꺾이는' 일이었다.
사제 수도자...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모두 이루어야하는 많은 일들 앞에서 '꺾인'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순간마다 꺾이는 사람입니다. 많은 일을 이루어낸 것만으로는 세상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편해지고 풍요로워졌지만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소리는 더 깊어졌고 상처도 넘치지요. 우리가 아버지 원하시는 순간에 내 뜻을 꺾을 줄 아는, 자존심 대신 눈 한번 더 감고 기도 한번 더 올릴 줄 아는, 남탓하고 싶거나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고 싶을 때 한번 더 참고 견디는 내가 될 때 우리는 더 자유로울 것이지요. 하늘에서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분들이 바로 순교자들 아니겠습니까.
제가 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순간의 '나'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형성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바르게 살아갈 때, 언제일지 모르는 그 순간이 주어질 때 비록 흔들리더라도 후회 없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잘 꺾이면 마지막 순간에도 잘 꺾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바쳐야할 것이 무엇인지 매순간 살피고 깨달아 매 순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부족하고 여러분들도 부족하니, 우리가 서로 기도해주어 하느님의 은총을 입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책상에 적어둔 글귀를 소개할까 합니다.
남들이 나를 몰라줘 서운할 때
나 역시 남에게 무심했음을 생각하고,
한 마디 말이 아프게 여겨질 때
나의 말이 비수된 적이 없었는지 생각하고
하느님 야속하다 싶어질 때
못다 채운 내 서원을 기억하리라.
피흘리는 순교는 우리 몫이 아닐지 몰라도,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은 그 누구의 몫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몫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님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