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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소년이 온다 본문
소년이 온다. 한강 장편소설. 창비.
큰맘 먹고 책을 다섯권이나 한국에서 주문을 했었다. 운송을 배로 했기 때문에 거의 한 달을 기다렸는데 도착하지마자 책상 위에 다섯 권을 쌓아두고 제일 먼저 이 책을 골라 들었다. 하지만 기다린 시간만큼 오히려 마음 졸이며 읽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게다가 책을 읽다가 버젓이 살고 있는 나를 만나, 울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잠시 주저...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아직도 나는 어쩌다 이런 일까지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으면서도 내가 광주에 대해 알았던 것은 대학생 때이다. 어렴풋이 참담해하시는 아버지의 어두운 표정이 기억나긴 하지만 감히 묻지도 못했고, 사실 몰랐어도 난 즐겁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매캐했던 87년을 통과하면서도 그저 조금 조심스러웠고 그들의 울분을 진심 안타까워하긴 했지만 놀고 공부하느라 바빴다. 돌이킬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시간.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이틀이 걸렸다. 이틀 동안 일부러 휴게방에 앉아 책을 읽었다. 내 작은 방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창이 넓어 환한 방에서 노을이 지고 어둠이 다가올 때까지 큰 의자에 몸을 잔뜩 구부려, 의자에 아예 몸뚱이를 구겨 넣은 채 읽었다. 그러다 밤이 오면 마지못해 방에 기어들어가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 불빛에 의지하며 나머지를 읽었다.
진수 오빠가 어떻게 여자들을 설득했는지 그녀는 후에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잊은 건지도 몰랐다. 여자들을 도청에 남겨서 함께 죽게 하면 시민군의 명예가 다칠 거라던 그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그 말이 정직하게 그녀를 설득했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서 흩어지세요.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 숨으세요.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 땀에 젖은 셔츠에 카빈 소총을 멘 진수 오빠가 여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웃어 보였을 때. 어두운 길을 되밟아 도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얼어 붙은 듯 지켜보았을 때. 아니, 도청을 나오기 전 너를 봤을 때 이미 부서졌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살아남은 자들을 생각한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여기던 사람들이 살아남아, 자신의 남은 삶을 마저 채워가는 아픔. 지나간 시간보다 다가올 시간이 더 지난할 것을 알면서도 통과해야 하는 삶. 원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갑자기 다가와 거칠게 씌워놓고 사라진 굴레 같은 삶. 선명함의 지옥.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시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또 다른 부류의 살아남은 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도 도처에서 매순간 영혼과 양심과 정의를 팔아치워 값싼 욕망을 산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죽여 살고 있지만 팔려간 영혼들이 소리 없이 떠도는 이 땅에 발딛고 서 있는 건 껍데기일 뿐. 그들의 비양심, 비도덕은 평소엔 잠복기 상태지만 여차하면 민낯을 드러낸다. 예수를 만난 악령이 성전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드러내듯 착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위대하고 진실한 이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압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들이 묵인한 불의는 열매 맺고 씨를 뿌려댔으며, 기묘하고 지독한 바이러스처럼 우리 사회 안에 틈틈이 뿌리를 내리고 서서히 물을 빨아들이며 자라나고 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마지막 장을 덮었다. 부쩍 쌀쌀해진 밤공기가 그날따라 더 차서 이불을 발 끝까지 잘 덮었다. 하지만 얼굴을 덮진 못했다. 이틀 동안, 나는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한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얕은 숨 뱉어내며 겨우 내린 결심이란 게... "한국에 가면 꼭 광주에 가보리라."일 뿐.
이 책을 끝내고 그렇게 기다렸던 '투명인간'을 읽기 시작했는데 머뭇거리기만 하고 진도가 영 안나간다. 방학이라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선뜻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광주의 그날에 대해서라곤 겨우 책 몇권 읽고, 영화 몇 편 보고, 기사 좀 읽은 나도 이런데 그분들 시간은 얼마나 더디게 흐를까. 그러고 보니 34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