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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제의실 갔는데 애들끼리 싸운 분위기다. 뭔일이냐 했더니 “저 오빠가 저한테 지랄하지 말라고 했어요.”한다. 통통하고 행동이 재바르지 않은 초4 여자애한테 초5 남자애가 “넌 힘세서 아이들 잘 때리겠네?”하며 뜬금없이 놀려서 대들었는데 옆에 있던 다른 오빠가 한 말이란다. 끈을 매다가 놀린 녀석들이 놀라서 엉거주춤하는 사이, 여자 아이는 참으려 애쓰는데도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하나는 울고 하나는 쫄고 하나는 노려보고 하나는 모른척 책을 보네. 애들 넷이 모여도 시끄럽고 탈 많은 어엿한 하나의 세상이다. 이 세상을 붙들고 얘기를 시작했다. 신부님이 들어와서 미사가 시작될 때까지, 아이들 모두와 얘기했다. 하나하나. 억울한 얘기면 반드시 아니라고 말해라, 울면서 참지 마라, 화나면 한 마디 해도 된다, ..
복사단 간식 중 탄산수는 중딩에게만 주고 초딩에게는 좀 더 건강한 과일주스나 초코우유 같은 걸 준다. 오늘은 중딩 오빠랑 초딩 동생이 함께 복사서는 날. 탄산수 먹고 싶어 냉장고 앞에서 투덜거리는 동생에게 오빠는 "니 얼굴은 대딩인데...ㅋㅋ"하면서 불을 지폈다. 마침 오늘 복음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는 게 아닌가! '복음 따라 사는 녀석들!'하며 이 두 다정한 오누이에게 내가 해 준 따뜻한 응원의 말은,"오씨 남매들! 왜 좋은 주먹은 놔두고 맨날 말로 싸우니?" ㅋㅋㅋㅋ
발목을 접질렀는지 절뚝 거리며 ㅊㅁ이가 할머니랑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마에 땀도 송글송글. 집안 형편상 평일미사를 잘 오기 어렵고, 할머니 말고는 자신을 챙겨줄 사람도 없는 ㅊㅁ이가 평일미사에 온 것이 너무 신기했다. 다리를 왜 절뚝거리는지부터 물어본 후 "평일미사에 왠일이야? 오늘 너무너무 더운데...." ㅊㅁ이도 신경이 쓰였지만 뒤따라 오신 할머니도 보통 힘드신 게 아닐 터. ㅊㅁ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ㄱㅇ가 복사를 선다고 해서 응원왔어요." 웃음 띠며 쪼르르 성수대 앞으로 달려가 기도한 후 성당문을 열고 자리를 잡던 ㅊㅁ이. ㅊㅁ이는 몸이 불편하신 아빠와 베트남 엄마, 할머니와 살고 있다. 아빠는 몸도 마음도 불편하셔서 ㅊㅁ이가 성당에 나오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첫영성체도 시키고 싶어..
얼마나 상냥하고 귀여운 아이인지. 다들 장난치느라 바쁠 때 훈이는 인사를 하고 웃느라 바빴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 놀았지만, 누구보다 열심이었지. 가끔 옆에 앉아 미사를 할 때면, 내가 성가책을 잘 볼 수 있도록 방향을 내 쪽으로 틀어서 정작 훈이는 옆눈으로 보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말썽 한 번 없었고, 함께 야단 맞는 때조차 (떠들지 않았으니) 억울할 법도 한데 진지하게 내 말을 들었다. 어제 미사 때 난 훈이 옆에 앉았다. 훈이 왼쪽 옆에는 훈이의 가장 친한 친구 현이가 앉았고. 훈이는 해맑게 웃으며 내게 옆자리를 조금 내어주었고 너무 가까이 오지도, 짖궂은 남자애들처럼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묵주기도를 계속 이어갔다. 어제는 마침 배가 아파서 밥을 제대로 못먹은 민이가 현이 옆에 앉아 있었는데,..
식당이 혼배미사 파티 분위기로 세팅되어 있는데, 첫영성체 녀석들은 자기들 저녁식산줄 알고 흥분ㅎㅎ "그게 아니라 토요일에 결혼식 있어"했더니 바로 한 녀석이 "수녀님 결혼해요?"라고. 난 고새 또 장난끼 발동하여 "어, 수녀님 이번 중에 결혼해"하니까 두손 모으고 부탁한다. "저 와도 돼요?"ㅋㅋ 한 녀석은 "저 들러리 서도 돼요?"까지. "어 수녀님 이번 주에 결혼해 ㅋㅋㅋㅋ " 이렇게 혼자 말해놓고 나니, 세상에 한 번도 못해 본 말이잖아!!!
엠마오다운 엠마오였습니다. 여태 성주간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채로, 오늘 아침에도 정신 없이 청소하고 복사도 없는 미사 덕에 부활 팔일 축제라고 해도 도저히 기뻐지지 않는 상태로 봉고에 실렸지요. 하지만 나른한 봄이 아니라 화창한 봄이 날 기다린다는 것. 엘에이에 있는 동안 그렇게 해보고 싶던 '꽃놀이'였습니다. 활짝핀 꽃들이 아니라 이제 막 피어오르는 수많은 꽃봉오리들... 완성된 부활이 아니라 이제 막 '되어 가는' 부활이었던 건가요, 주님? 저에게 필요한 것은, 때가 되면 별 감흥도 깨달음도 없이 그저 날짜에 맞춰 부활하게 되는 삶이 아니라 개화를 기다리며 아직도 더 피어야 하는 삶인 것을 이렇게 조용히 일러주시는 당신. 제가 있는 큰 성당과 이렇게 작은 성당, 그 어떤 것도 나 자체는 아님을.....
캠프 떠난 애들 응원차 잠시 들렀다. 잠시라 해도 왕복 네시간 반. 전기도 없이 텐트치고 자고 수영복입고 야외샤워를 하는 곳에서 애들이 뛰어논다. 미국에서 태어난 애들이라 한국말도 잘 못하는데 노는 게임은, "아싸~ 가오리" ㅋㅋㅋ 폰도 없고 컴도 없는 곳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럭저럭 뛰어논다. 늘 심드렁하고 무기력한 V는 출발할 때까지도 비실대더니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보니 텐트에서 자고 있다. 내가 왔다니깐 울며 겨자 먹기로 텐트를 나와 어슬렁 거리다가, 밥 먹은 후 또 비실대기. 그러다 기운 차려서 겨우 한다는 게 혼자서 줄넘기. 기어나온 것만해도 고맙다만, 짠하다! 어쨌든 애들은 해맑게 뛰어놀고, 학사님들은 사제로서의 자신들의 삶을 그려보고, 교사들은 봉사의 보람을 찾는다. 어느새 어둔한 한국말로..
이곳에 오기 전 본원에서 종신서원 때 받은 선교사 십자가를 걸고 선교사 파견식을 받았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또 십자가를 받았다.그레고리성당 신자들은 사순시기 동안 십자가를 걸고 다녀야 한다고... 눈에 드러나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신자임을 드러내야하는 어색함을 견뎌야 하고,십자가를 건 순간부터, 십자가를 의식하게 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그 무게와 불편함도 고스란히 내 몫이 된다.너무나 가까이 느껴지는 십자가의 낯설음도 인정해야 하고,가끔은 무심결에 십자가로부터 상처도 입어야 한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