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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훈이는 본문
얼마나 상냥하고 귀여운 아이인지. 다들 장난치느라 바쁠 때 훈이는 인사를 하고 웃느라 바빴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 놀았지만, 누구보다 열심이었지. 가끔 옆에 앉아 미사를 할 때면, 내가 성가책을 잘 볼 수 있도록 방향을 내 쪽으로 틀어서 정작 훈이는 옆눈으로 보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말썽 한 번 없었고, 함께 야단 맞는 때조차 (떠들지 않았으니) 억울할 법도 한데 진지하게 내 말을 들었다.
어제 미사 때 난 훈이 옆에 앉았다. 훈이 왼쪽 옆에는 훈이의 가장 친한 친구 현이가 앉았고. 훈이는 해맑게 웃으며 내게 옆자리를 조금 내어주었고 너무 가까이 오지도, 짖궂은 남자애들처럼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묵주기도를 계속 이어갔다. 어제는 마침 배가 아파서 밥을 제대로 못먹은 민이가 현이 옆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걱정이 되어 훈이에게 "민이랑 자리를 바꿔줄래?"하고 물었다. 제일 친한 현이를 사이에 두고 바꾸는 거니까 서운할 일도 아니고 성당 자리로 치자면야 더 중앙으로 가는 것이니 애들이 좋아하는 자리이고 무엇보다 늘 말 잘 듣고 친절한 훈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처음으로 훈이는 내게 싫다고 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아니요, 수녀님." 훈이가 처음으로 거절을 한 터라 적잖이 놀랐는데, 금방 나는 알 수 있었다. 늘 얌전하고 모범적이었던 훈이도 내 옆에 앉고 싶었고 모처럼 자기에게 그 자리가 돌아왔으니 아무리 민이가 아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는 걸. 물론 민이가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니기도 했고.
훈이는 역시나 미사 내내 나에게 미소 지으며 열심히 노래하고 기도문을 외웠다. 날 위해 성가책을 펼쳐서 들어주고 화답송 때는 매일미사 책을 들고 손가락으로 밑줄까지 그어주었다. 훈이 역시 또래 아이들과 다름 없었다는 걸 새삼 느끼며 미안하고 고마웠다.
흐뭇한 마음으로 훈이를 지켜보다가 십자가로 눈길을 돌렸다. 훈이가 양보하고 싶지 않았던 '수녀님의 옆자리' 같은 것이 내게도 있었던가. '예수님 발 아래'를 훈이처럼 두말 않고 지키고 싶어했던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고요한 기도의 시간'을 나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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