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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거룩한 독서의 내적 조건 본문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거룩한 독서의 내적 조건

하나 뿐인 마음 2013. 1. 13. 21:25

▷들어가면서

대수련자 성경 수업 첫시간에 베아타 수녀님께서 대뜸 성경을 어떻게 읽냐고, 묵상이 요새 어떠냐고 물으셨습니다. 제 대답은 너무도 솔직하게 “말씀이 내 안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고 계신다.”였습니다. 너무도 무디어져 말씀이 비집고 들어오실 틈을 좀처럼 내어드리지 않는 제 완고함에 대한 말이기도 하고 반대로 자아도취, 합리화 등의 껍데기를 벗고 보니, 거품을 좀 걷고 나니 열심한 묵상 안에도 ‘나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허상이 가득하더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이 나의 변명을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욕망을 비추고 드러내기 시작하시더라 라는 겁니다.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Lectio를 실천하면서 제일 먼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이 경험을 통해 당신이 얼마나 변명하는데 재빠른 사람인지를 통찰할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이런 저런 이유 덕분에 Lectio Divina는 요즘 제 삶의 첫 자리에 위치합니다. 허나 이렇게 말해도 되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준비한 부분은 거룩한 독서의 내적 조건입니다. 얼른 들어가겠습니다.

 

▷ 들음(귀기울여 들음)

기도로 곧바로 이어지는 성경읽기, 혹은 성경읽기에서 곧바로 샘솟는 기도. 이연학 신부님은 거룩한 독서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는데요, 그 이유는 ‘읽기’가 다름 아닌 ‘듣기’이기 때문이랍니다. 사부님 말씀 생각나시지요? 거룩한 독서를 자주 ‘들어라(RB 4,55).

초기 수도자들의 작품들에서 독서(lectio)와 들음(auditio)이라는 두 용어는 자주 동의어로 사용되곤 했는데요, 이유는 말씀을 읽으면서 동시에 귀 기울여 그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의 독서는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읽는 수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귀 기울여 듣는 수행이었습니다. 장 르끌레르 신부님은 “청각적 독서”라는 표현을 하셨고 서인석 신부님은 거룩한 독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신인(受信人)의 정신 상태를 얻어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한자로 성인(聖人)은 잘 듣고(耳), 잘 말하는(口) 자를 의미합니다. 정달용 신부님은 여기에 王자까지 해석해서 성인을 ‘듣고 말하는 것을 잘 다스리는 이’라고 하십니다. 허나 많은 경우 잘 듣지 않고, 잘 말하지 못해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굳이 멀리서 들지 않아도….

듣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듣는다는 것은 우선 상대방이 내 앞에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현존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아가 어떤 식으로든 나를 비워서 상대방이(누구신지 알지요?) 내 안에 들어오게(오시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 안에 그가 있을 자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바오로 사도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성전’도 이 맥락에서 알아들을 수 있겠네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2Cor 6,16) 말씀을 참되이 들을 때 나는 나에게서 빠져나와, 내 존재는 그만 말씀하시는 분께서 머무시는 ‘집’이 되기에 이릅니다. 탈중심(脫中心)의 듣기라고 할까요? 거룩한 교환? 숨쉬기?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내 안의 무엇, 즉 ‘내것’이 아니지요. 공기가 들어와야 숨을 쉬는 것처럼,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야 그제야 비로소 내가 제대로 산다는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성규 머리말이 “들어라, 오 아들아!(Obsculta, o fili)”로 시작하는 것일까요. 또 9절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시며 훈계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여 들을 것이니,”라며 ‘들음’을 강조합니다. 내친 김에 다른 분들 말씀도 들어볼까요?

-아를 체사리오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 말씀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마치 우리가 성체를 소홀히 하여 길바닥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고 지적합니다. 세상에나….

-앙드레 루프 “하느님께서는 성경 독서 시간에 친히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건네신다. 그러므로 각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온힘을 다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성경 전반에서 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Deut 6,4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결국 인간은 귀가 있어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진리에 속한 사람만이 진실로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까지 합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Jn 18,37)

‘듣는’ 사람은 비로소 자기가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심지어 자기가 자기 스스로의 중심도 아니라는 사실(사실이라기보다 진리에 가깝지요?)을 알아듣습니다. 드디어 겸손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지요. 내 拙時

내가 물주고내 맘대로 자리를 옮겼기에

꽃의 주인은 당연히 나라고 여겼는데

진짜 주인은 따로 있었구나.

내 맘대로 생각하고내 의지대로만 행동했기에

나의 주인은 당연히 나 자신이어야 한다고 여겼는데

진짜 나의 주인 역시 따로 계셨음을...

 

준비하다가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조건이 모두 갖추어졌을 때 거룩한 독서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툴러도 노력하는 중에 갖추어 나가거나 그렇게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겸손처럼…설익었던 우리들이 불리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하지만 이 들음이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말씀에 저항하는 세력이 내 안에 엄연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듣고 그 말씀에 비추어진 자신의 초라한 실상에 직면해야함, 거짓자아상을 갈아엎어야 함 등은 실로 두려운 일이지요. 경험상 말씀은 마음의 가장 어두운 영역을 드러내어 직면케했고, 나는 어떤 형태로든 이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나의 갈망이 진심인지를, 들었다고 여겨지는 이 말씀이 진짜 그분 목소리인지를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렇게 내 약함으로 인해 말씀이 내 안에서 메아리치지 못하기에 선포와 동시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초기 수도자들은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 독서 시간에 깨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기에 그들은 온 마음과 정신을 열고 그 말씀을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마음 깊이 간직, 실제적으로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었습니다. 듣는 수행이 깊어질 때 어떤 말씀이든지 우리를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우리 안에서 꽃피우고 열매 맺게 되는 것이지요. 초기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어야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거룩한 독서에 있어 ‘하면 된다!’나 ‘精神一到何事不成’도 늘 통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들 경험 있으시지요?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갈 수도 있더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독서는 자기 수행의 간절함과 투철함에 그 결실이 좌우되는 영성의 방법이나 기술, 기법이기 이전에,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듣는 나’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여 듣고, 또한 깊은 눈으로 응시하지 않으면 안되지요. 제 경험으로는 바로 이때가 우리에게 겸손과 침묵을 체득시켜주시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기도하려는 내 열망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이 있다. 즉 내가 기도하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열망이다.”는 헤셸의 말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정신이 번쩍 들 쓴소리를 ‘들어보고’ 기억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관상가 대그 함마숄드가 한 말입니다. “귀기울여 듣기를 당신이 결코 원하지 않을 때, 어떻게 당신의 청력을 보존하리라 기대할 수 있는가? 당신이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당신을 위해 내셔야할 시간도 꼭 같다!”

▷침묵

거룩한 독서에서 고요와 침묵의 분위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철저히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마음의 심연이 침묵에 잠기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없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성규 48장에서 렉시오 디비나에 전념해야 할 시간에 “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 자신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무익하고 방해가 되는 형제들이 없도록, 한두 사람의 장로로 하여금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했지요. 베네딕토 성인이 권고하는 침묵은 정신적인 고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침묵이며 수도원과 주위의 고요함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 계시고, 나를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다면 그분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다른 목소리들이 잠잠해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사람의 목소리들은 잦아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다른 사람의 말, 무엇보다도 나의 말!)이 하느님 말씀을 질식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침묵과 고요는 성령이 내 안에 오시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몬떼 아토스의 한 수도승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성령과 함께 있을 때는 마치 비둘기와 함께 있듯이 처신해야 한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우리가 고요하고 동요하지 않을수록, 더 민감한 감수성으로 기다릴수록, 더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편에서의 침묵이란, 말씀 안에서 드러나는 그분 충만함 앞에서 내가 텅 빈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침묵은 우리 시선을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시키도록 도와주며, 성경을 읽는 중에 그분을 기다리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침묵은 우리 힘만으로는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유일한 것으로서 그분을 찬양하게 도와주줍니다. 마치 시편 작가의 벌린 입을 채워주시듯(ps 81,11) 하느님께서는 침묵의 속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내 삶은 경청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말씀하심이다. 나의 구원은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침묵은 나의 구원이다.”(토마스 머튼)

▷ 기억

기억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는데요,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인간의 정신 속에 간직하고 되살리는 것이라고 되어있고, 경험은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을 뜻합니다. 합쳐보면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본 것을 정신 속에 간직하고 되살리는 것’이 바로 기억이 되겠지요. 조사하다가 말씀이 바로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본 것’이 되어야함도 의미심장했고요, 이러한 말씀이 ‘정신 속에 간직하고 되살려야한다’는 문장이 주는 충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대에는 대부분의 수도승들이 읽거나 쓸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간직하고 되살리기 위해, 즉 기억하기 위해 수도승들은 그들이 들은 바를 인격화하면서 거듭 반복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하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기억에 간직하며 끊임없이 그 말씀을 암송하는 단순한 묵상(되새김)을 실천했단 겁니다. 그들은 바구니를 짜거나 돗자리를 만들거나 혹은 다른 일을 할 때도 들은 말씀을 되새김질 하였습니다. 반복과 숙고를 통한 끊임없는 기억, 이것은 그들의 영혼 안에 하느님을 향한 감정과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카시아노 성인은 ‘순수한 기억은 안전하게 만나를 보존시킬 수 있는 “황금 항아리”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지듯 인간의 기억이라는 그릇에 하느님의 말씀을 담는다면 … 종내 우리가 무엇이 될지는 다 아시겠지요.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기억 속에 성경 전체를 간직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파코미오 성인은 더욱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기억 속에 간직된 성경 말씀을 끊임없이 되뇌는 수행을 했는데요, 입회하려는 사람들에게 준수사항과 더불어 최소 스무 개의 시편과 두 개의 서간 또는 다른 부분을 주어 외우도록 권했다 합니다. 이밖엡. 이렇게 기억은 당시 수도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었던 의무였습니다. 온종일 지속적으로 기억 속에 간직된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암송함으로써 사탄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일어나는 메아리 체험! 전 며칠전에도 이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기억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또는 마음에 새기는 방법)는 반복(repetitio) 비슷한 의미의 바실리오 성인이 하느님의 기억, 즉 memoria Dei라고 말한 되새김ruminatio(반추)이 있습니다. 생-티어리의 굴리엘모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경 전체에 있어서 주의깊은 독서, 즉 ‘되새김’은 단순한 독서와는 대단히 다르다. 그것은 우정과 손님 환대가 서로 다른 것과 같다. 형제의 정과 때때로 만나는 사이가 다른 것과 같다. 매일 독서한 것으로부터 기억의 위장으로 무엇인가가 내려가야 한다. 그리하여 더 완전히 소화되고, 그런 후 다시금 끄집어내어져서, 더 자주 되새김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마음의 입 안에서” “마음의 구강”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meditatio가 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순히 단어나 구절을 입으로 소리내어 거듭 읽는 것’을 지칭했다는 걸 보면 묵상이 정신활동이라기 보다 신체활동에 가까웠다고 하겠습니다. 귀고 2세의 표현을 빌리면, 묵상 단계의 시작은 “씹는 일”입니다. 이래서 독서 행위에는 전인(全人)이 투입된다 혹은 전존재로 암기한다고 하지요. 어떤 분은 인간 전체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표현도 하셨습니다. 제가 필사를 좋아하는데요, 그동안 pen으로만 필사를 했구나 하는 반성이 됩니다. 여하튼 고대 수도승처럼 우리들도 우리 안에 마르지 않는 상기의 능력을 길러야 할 텐데요, 틈날 때마다 말씀을 주워듣고 끊임없이 중얼 중얼거림으로써 읽고 듣고 이해한 하느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활동을 하는 겁니다. 즉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셈이지요. 장 르끌레르 신부님은 근육이 기억한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되새김이 머리가 기억하기 전에 근육이 먼저 기억하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육화라 해도 되겠습니다. 그분이 육화, 나의 존재를 형성하여 느낌, 판단, 사색, 실천 등 전반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독서는 기억을 통해서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에로 나아가게 되고, 기억은 성경 독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머무르는 거룩한 처소가 되어 그 충만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기억 속에 간직된 하느님의 말씀을 하루 일과 중에 끊임없이 암송하는 되새김을 통해서 마침내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독서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빨리 그리고 단순히 읽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자 부지런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순간을 통해 하느님 말씀과 끊임없는 접촉상태를 이루는 것은 이냐시오 수녀님만의 목표는 아니겠지요. 목표라고 해도 될까요? 성경을 읽음에서 들음으로, 들음에서 먹음으로 점차 나아가는, 그리하여 살아있는 성경이 되는 것. 그러나 기억이라는 것이...쪽지 등. 저는 그 실행으로 얼마 전부터 조그만 성경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쪽지건 성경이건, 중요한 것은 말씀과 한순간도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일 겁니다.

 

▷마치면서

효과있는 뭔가를 지향하는 오늘날, 의미 있는 뭔가를 지향하는 우리들. 거룩한 독서의 효과, 의미는 우리가 거룩한 독서를 한다고 여기는 1시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23시간, 혹은 포함한 24시간에서 찾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수도자의 삶은 주어진 24시간을 하느님의 시간으로 바꾸는 삶이라 하던 어떤 젊은 신부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역으로 나머지 23시간이 1시간을 위한 준비시간, 또는 감각을 키우는 시간이라는 말도 맞다 하겠습니다. 거룩한 독서의 본질은 ‘성경읽기’가 아니라 ‘성경살기’와 관련된 것일 겁니다. 베네딕토 규칙서의 전문가 A. Wathen에 따르면 성 베네딕토에게는 기도가 그러하듯 거룩한 독서 역시 수도승 생활의 한 부분으로 한정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수행이라기보다 삶의 방식이고, 정해진 시간에 행하는 특정한 영성수련이라기보다 삶의 근본자세, 정해진 시간의 양을 채우는 의무라기보다 삶의 질이었습니다. 실천하는 사람만이 말씀을 진정으로 경청할 줄 알지요. 사는 만큼 아는 거지요. 성경 본문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려주시는 말씀에 대해 삶으로 에누리 없이 순종할 때 생깁니다. “말씀의 경청은 듣는 이로 하여금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 못하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성체가 그러하듯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게게 구원 아니면 단죄를 낳는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먹지 않고 저장된 만나의 교훈), 구더기가 끓게 할 것이다.” 쌍날칼과도 같은 말씀이 지닌 심판의 효력에 관한 체사리오 성인의 말씀입니다.

밖에 필요한 내적 조건으로는 "하느님께서 바로 이 성경 본문을 통해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을 주고 계신다"는 믿음, 늘 현존 아래 깨어 살기, 끊임없이 기도하기, 말씀을 탐구하되 말씀이 나 자신을 탐구하시게 하기(토라는 너를 몇 번 꿰뚫었느냐?), 내 삶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내 존재를 형성할 수 있도록 허심(許心)하기, 내면에 귀기울임에 속하는 자포자기, 끝까지 버티기 혹은 지그시 견디기, 투명한 마음가짐 등이 있습니다. 나머지 숙제는 요세피나 수녀님께 넘기고 저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님의 말씀으로 끝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의 몸에 다가가듯 성경에 다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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