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신앙의 중심에 있는 생태 환경 본문

데니스 에드워즈 지음. 이다한 옮김. 도서출판 작음.
p.18 ~ p.19
"생태 운동은 지구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 여성의 완전한 평등을 위해 헌신하는 서로 연관된 운동과 함께 오늘날 하느님의 영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중요한 방식을 보여준다고 나는 확신한다."
p.18
"생물 다양성 손실이 신학의 문제라는 주장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인간이 다른 종을 멸종시키는 것은 하느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말살하는 것이며, 그분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을 훼손하는 행위다."
p.20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지구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도록 요청받는다. 이 과정에서 교회 자신은 생태적 회심으로 부름받는다."
p.21
"교회는 정의의 투쟁에서 가난한 이들 그리고 완전한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에서 그들 편에 서도록 요청받는 것과 같이 고통받는 피조물의 편에 서도록 부름받는다. 하느님의 영이 인류 공동체 안에 불러일으키고 계시는 훨씬 더 광범위한 회심 운동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p.30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창세기의 명령은 평범하고 비천하며 상대적으로 무방비인 인간에게 자연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질 수 있었던 고대의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명령이 유래한 시기에 이스라엘 이웃 민족들의 창조 설화는 인간이 신들의 노예로 태어났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창세기는 인간의 소명을 가축 떼가 번성하고 농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땅에 지성과 용기와 노력을 쏟는 "왕다운" 소명으로 규정한다. 유다 세계에서 이러한 왕다운 역할은 양떼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은 권력과 권위에 대한 모든 지배적인 관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것이기에 여전히 유효하다."
p.31
"하느님 중심적 관점에서 다른 생명체는 하느님이 주신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 그들은 그 자체로 가치, 곧 본질적 가치를 지니며 인간은 그 가치를 존중하도록 부름받았다."
p.33
"바로 창발적이고 진화적인 방식으로 창조하는 것이 하느님의 특성이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발적인 피조물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우주에서 태어났으며 140억 년 전 초기 우주에서 생겨난 수소 원자로 이루어졌다."
p.35
"원시 수소를 제외하고 지구에서 자연적으로 발견되는 모든 원소의 원자는 모두 별에서 기원한다. 나의 정맥을 흐르는 피와 뇌에서 번쩍이는 신경 세포의 탄소 원자 하나하나는 별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별먼지로 만들어졌다."
p.41
"하느님의 모상 개념은 인간을 초월한다. 이 개념은 참된 모상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며, 모든 피조물은 그분 안에서 구원과 새 생명을 얻는다. 하느님의 모상 개념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 예수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느님의 모상이시다. 그분 안에서 만물의 화해가 시작되었다."
p.43
"그리스도교 창조 신학은 하느님을 모든 피조물의 특수성, 온전함, 고유한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들과 관계하시는 분으로 이해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에게 독특한 것은 인격적이라는 것, 곧 상호 인격적 사랑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 다른 이에게 나아가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인간의 이러한 인격적 차원이 인간을 하느님이라는 근본적 타자와 다른 인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료 피조물인 타자와 맺는 관계에 참여시킨다."
p.44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느님처럼 땅에 떨어지는 참새 한 마리도 돌보도록 부름받았다. 인간은 하느님이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감정적이고 의인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캥거루나 수리, 고래의 특수성과 타자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동료 피조물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았다."
p.45
"인간은 상호 인격적 사랑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 산맥, 화려한 앵무새, 높이 솟은 큰 나무, 바람 에 휘어지는 고운 야생화, 이들 역시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기표현이며 세상에서 하느님 현존의 성사다. 그들은 각각의 특수성으로 하느님을 표상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지닌 명확한 특수성은 그들이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라는 것이며,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처럼 다른 피조물과 관계를 맺는 소명에 참여한다."
p.53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은 그리스도교 생태 신학에서 문제가 된다.
이같은 주장은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약화시킨다. 이 주장을 절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박테리아의 도덕적 가치와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분별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또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특별함을 포기함으로써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의 근본적인 기초를 약화시킨다. 이러한 관점은 생태적 책임의 강력한 원천도 훼손한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 대해 특별한 도덕적 책무를 갖는다. 인간에게는 자신들이 초래한 생태 위기에 긴급하고 창의적이며 지혜롭게 대응해야 할 특별한 도덕적 요구가 주어져 있다."
p.55
"친족 관계는 인간이 인격체로서 다른 피조물과 직접 교감하며 우리 자신과는 다른 점이 많은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수반한다. 그것은 다른 피조물을 사람으로 인격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피조물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p.57
"친족 관계는 그 자체로 지구 공동체 안에서 인 간의 책임을 아주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성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재능이 자연세계를 약탈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창조성과 지성을 활용하여 지구와 지구의 피조물, 인간과 인간이 아닌 피조물을 치유할 수 있다."
p.58
"청지기가 다른 피조물 앞에서 인간의 태도를 특징적으로 규정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될 중개자라는 과장된 관점을 암시할 위험이 있다. 청지기는 다른 피조물이 살아 계신 하느님과 고유한 관계 또는 그들 자신의 온전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p.59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이 다른 피조물 앞에서 취하게 되는 이러한 자세는 지혜와 관련된다. 지혜는 독특한 형태의 지식이다.
그것은 완전히 이해하거나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자의 신비를 존중한다. 지혜는 자연세계 앞에서 겸손과 경이로움을 수반 하는, 사랑에 찬 지식의 형태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비와 창조세계의 신비 앞에서 인간이 유한함을 인정하는 것도 포함한다."
p.59
"중요한 것은 피조물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 친족 관계 모델에 내포된 회심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 회심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이 생명 공동체, 곧 각 피조물이 하느님 앞에서 저마다 특별한 가치를 갖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피조물과 서로 연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창조성은 다른 피조물 앞에 겸손하게 서서 그들이 생존하고 번성할 권리를 존중하고, 다른 피조물의 보전과 번성에 헌신하는 것이다."
p.60
"우리는 그들의 일부며, 그들은 우리의 일부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기원인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다 같이 반영한다. 우리는 우주에서 태어났고, 별먼지로 만들어졌으며, 지구 생명체 진화 역사의 일부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구에 있는 실로 놀랍도록 다양한 식물, 곤충, 새, 동물과 한 가족이며 지구와 그 모든 피조물을 가꾸고 돌보도록 부름받았다."
p.63
"진화적 창발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힘이며, 신음하는 피조물을 동반하는 분이고, 창조세 계에 형언할 수 없이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인 성령."
p.79
"칼 라너는 창발적인 우주에 적합한 새로운 창조 신학에 기여했다. 그는 하느님이 피조물의 능동적인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과정을 통해 그들을 창조하신다고 생각한다. 초월한다는 것은 "뛰어 넘다"라는 뜻이다. 라너는 하느님을 진화하고 창발하는 우주에서 지속적으로 일하면서 피조물 자체에 새로운 무언가가 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이전의 것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지속적으로 주시는 분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p.85
"하느님의 힘은 타자의 온전함과 자율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능력으로 간주되는 힘에 대한 모든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p.85
"발터 카스퍼가 지적하듯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랑으로 당신을 내어 주시는 초월적인 힘으로 드러난 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힘이다. 하느님은 십자가에서 하느님 당신의 힘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을 포기하고 내어줄 수 있기 위해서는 전능함이 필요하다.""
p.103
"비유들은 하느님의 장소인 자연세계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기쁨을 반영한다. 그것들은 관조적이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피조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C. H. 도드가 자신의 고전적인 연구에서 결론 내리듯, 이 비유들은 예수에게는 "자연 질서와 영적 질서 사이에 내적 유사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도드는 "자연 질서의 신성함에 대한 감각이 모든 비유의 대전제"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예수의 비유는 창조세계를 하느님의 선물이자 하느님 현존의 장소로 보는 이의 작품이다."
p.104 ~ p.105
"예수가 자연에서 비유들을 가져오고 광야에서 기도를 바치신 것에 대한 복음서의 기억은 비인간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연민에 관련된 예수의 분명한 말씀을 해석하는 맥락을 제공한다. 잘 알려진 이 말씀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공중의 새와 들판의 나리꽃 하나하나를 먹이고 입히신다고 가르치며, 땅에 떨어진 참새 한 마리도 돌보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에 초점을 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에는 땅에 떨어진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에게 중요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복음서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독특하고 특별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 지 다 세어 두셨다." 그렇지만 복음서는 또한 이러한 연민과 섭리적인 돌보심이 모든 참새 하나하나를 포함한다고 진술한다."
p.114 ~ p.115
"지혜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인성이 선재하지 않음을 옳게 상기시켜 준다. 그것은 신적 생명 안에 선재하는 것에 관한 온전한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을 촉진한다. 그리고 선재하는 지혜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양자를 초월한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또한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만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서 표현됨을 지적한다. 이러한 지혜 신학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생명 나무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묘사한 로마 성 클레멘스 성당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에 표현되어 있다."
p.115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는 나자렛 예수가 육이 되신 말씀(Word made flesh)이라는 확신이 있다. 여기에서 육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의 완전한 인간 실재뿐 아니라 하느님이 육화 안에서 포용하신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 이레네우스와 아타나시우스 같은 위대한 교부 신학자들이 가르친 것처럼 하느님은 인간 전체가 치유되고 하느님에게 들어올려져서 그분 안에서 신화될 수 있도록 육이 되신 말씀 안에서 사람이 되셨다."
p.115 ~ p.116
"육화, 곧 육이 된다는 의미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포용하신 육은 인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육을 지닌 생명이 서로 이어진 세계 전체를 포함하며, 어떤 면에서는 생물이 연관되어 의존하는 전 우주를 포함한다."
p.116
"뉴질랜드 신학자 닐 다라는 "하느님이 육이 되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구의 피조물이 되셨다는 것, 지각 있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 (다른 모든 생물 과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되셨다는 것, 무기질과 유동체로 이루어진 복잡한 지구의 구성 단위가 되셨다는 것, 탄소와 질소 순환의 한 부 분이 되셨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p.117 ~ p.118
"바오로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전통은 전체 피조물이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기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주장한다. 나는 깊은 육화의 개념이 이러한 전통에 충실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모든 피조물의 맏이",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 "만물을 존속시키시는" 분으로 그리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이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고 찬양하는 콜로새서의 찬가와도 조화를 이룬다."
p.117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육화는 근본적 또는 "깊은" 육화, 곧 생물학적 존재의 조직과 자연의 체계 안으로 육화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회적 경쟁의 희생자들은 물론 모든 지각 있는 생명과 함께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의 구속적 상징이 된다. 하느님은 진화의 대가, 곧 자연선택의 고난에 따르는 대가를 치르신다. (닐스 그레거슨)"
p.118
"오늘날 셀 수 없이 많은 형태의 생명체가 파괴되고 더 많은 생명체가 위협받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God-with-us)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하시는 하느님(God-with-alliving-things)이 라는 의미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p.118 ~ p.119
"깊은 육화 개념에서 그리스도 사건은 하느님이 지구 생명체의 진화 역사에 참여하고, 유한한 피조물의 존재를 내부에서 포용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육이 되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 한가운데에, 결과적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의 한가운데에 계시된다. 예수의 육신은 지구의 생명이 피조물로서 갖는 모든 형태 가운데 일부다. 말씀이 육이 되실 때 하느님은 한껏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이 지닌 그 기나긴, 서로 연결된 역사를 포용하신다. 육화는 생물의 "바로 그 조직(very tissue)”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생물의 바로 그 조직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사건과 진화 역사 사이의 신학적 연관성에 대한 질문을 추가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p.120
"피조물은 하나의 기원을 갖고, 하나의 결속된 세계로 자기를 실현하며, 하느님 안에서 하나의 미래를 갖는다는 점에서 일체를 이룬다. 이 일체성은 하느님이 피조물의 우주를 창조하신 그 목적(자기증여 self-bestowal)에 근거를 둔다."
p.121
"라너는 프란치스칸 신학을 받아들여 우주는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언제나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려고 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죄 많은 세상에서 육화가 용서의 은총을 주는 사건임에는 틀림없지만, 일차적으로 그것이 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육화는 언제나 하느님 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라너에게 창조와 육화는 하느님이 세상에 당신을 증여하시는 하나의 활동에서 구별되는 두 부분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당신을 내어 주시는 하나의 과정에서 구별되는 두 측면이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
p.122
"라너의 중심 사상에서 하느님은 장대한 진화적 창발의 유형을 불러일으키고 가능하게 하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이 유형에서 물질은 자신을 초월하여 생명이 되고, 생명은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 안에서 스스로를 초월한다. 인간은 은총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 안에서 자신을 초월하고, 전체 진화 과정은 나자렛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스스로를 근본적으로 초월한다."
p.122
"하느님은 진정한 새로움이 창발할 수 있도록 내부로부터 우주에 힘을 실어주시는 분으로 여겨져야 한다. 라너는 이것을 피조물의 자기초월 능력이라 부른다. 이 능력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피조물이 생겨나기 위해서 그들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피조물에 속하지만 피조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자기초월 능력은 피조물을 존재케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이 될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의 내재적인 창조적 현존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우주에 있는 각각의 모든 개체에 현존하시는 창조주 성령에서 비롯된다."
p.123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우주는 처음부터 창조주와 더 의식적인 관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질적인 우주는 인간 안에서 자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피조물은 인간 안에서 인격성을 갖추게 되었다. 피조물이 인격성을 갖추게 되면서 인간은 성령 안에서 당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앞에 서게 되었다. 우주의 일부인 인간은 창조주와 서로 인격적인 관계 안에 초대된다. 그들은 사랑과 감사, 찬양으로 하느님에게 응답할 수 있는 우주의 일부다."
p.124
"창조의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창조된 우주가 하느님을 향해 스스로를 초월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측면에서 예수는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통교로 볼 수 있다. 예수에게서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을 우주에 내어 주시고 우주가 피조물의 완전한 동의로 응답하는 것 모두를 볼 수 있다. 예수는 우리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자기통교이자 하느님에 대한 피조물의 완전한 "예"이시기 때문에 라너는 예수를 절대적인 구세주로 본다."
p.144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일치는 하나의 견해나 관심사가 다른 것들을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상태로 빠르게 무너진다. 삼위일체 신학은 친 교뿐만 아니라 다름도 긍정한다. 그것은 다름 안의 일치를 하느님의 중심에 둔다. 삼위일체 신학은 실재에 대한 관계적 관점을 지지하지 만, 그것은 차이와 다름이 꽃필 수 있는 특정한 유형의 관계성이다."
p.147
"삼위일페의 자기표현인 피조물의 다양성"
p.149
"각각의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서로 다른 측면을 반영한다. 피조물의 풍부함은 하느님의 무한하고 풍성한 생산성을 나타낸다."
p.150
"우리가 지구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종은 하느님의 성사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만물을 충만 하게 하고 존재하게 하시는 분을 표현하고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에 인간이 무자비하게 생물종을 절멸시키고 그들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행태에 반기를 든다."
p.189
"성찬례는 1)모든 피조물을 들어올리는 것, 2)창조와 구속에 대한 살아 있는 기억, 3)우주적 그리스도의 성사, 4)하느님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삼위일체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5)기후 변화와 그 밖의 생태 위기를 겪고 있는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p.190 ~ p.191
"지지울러스는 세례를 받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충만한 인격적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본다.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폐쇄적이기보다는 관계적이어야 하며,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타자를 향할 수 있어야 한다."
p.191
"인간은 성찬례에 올 때 창조의 결실을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전체 피조물을 성찬의 식탁으로 가지고 온다. 성찬례에서 봉헌과 감사를 통해 피조물은 하느님에게 들어올려진다."
p.193
"유다교 기도 형식과 초기 그리스도교 감사 기도 모두 창조와 구속에 대한 아남네시스를 담고 있다. 지지울러스는 같은 점을 지적하면서 고대의 모든 성찬 전례가 창조에 대한 감사로 시작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에 대한 감사로 이어졌으며, 그 전례들 모두 창조의 선물을 창조주에게 들어올리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고 주장한다."
p.194
"우리는 모든 성찬례마다 피조물, 곧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빵과 포도주를 식탁에 가져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감사 기도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속 활동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아버지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분을 저희에게 구세주로 보내셨으니(감사 기도 제2양식)." 감사 기도는 우리가 성찬례에 올 때 피조물과 함께 오고 지구의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여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몸소 창조하신 만물이 아버지를 찬미하나이다(감사 기도 제3양식)." "저희도 그들과 함께 하늘 아래 모든 조물과 더불어 기뻐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나이다(감사 기도 제4양식).""
p.195
"우리는 오늘날 지구의 생명 공동체가 취약한 상태임을 기억하고 이를 하느님에게 가져온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성찬 예식마다 거행되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감사 기도 끝부분의 마침 영광송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이 누리시는 영원한 찬양과 영광으로 모든 피조물을 들어올린다."
p.200
"예수의 십자가는 타인의 고통 앞에 안일한 모든 태도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받는 이들을 그리스도교 신앙 바로 그 중심에 둔다. 그리고 전쟁, 탄압, 자연재해로 희생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상태를 이기적이고 사상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반기를 든다. 부활은 세상의 고통에 대해 역동적인 희망의 이상을 제시하지만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무디게 하지는 않는다."
p.201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의 다른 측면들은 지구 공동체의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생명, 가정, 생계, 공동체의 이러한 파괴에 일조하는 것은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지구, 곧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선물에 대한 죄이기도 하다.""
p.202
"우리는 성찬례마다 우리의 모든 평범함과 한계를 가지고 한자리에 모인다. 우리는 인간의 손으로 땅을 일구어 얻은 결실을 들어올린다. 우리는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 얻게 된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모든 사랑 안에서 그분을 만난다. 그리고 그분이 만물을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현존하심을 다시 알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삼위일체의 종말론적 친교에 참여하고 그것을 맛본다. 성령을 통해 회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p.210 ~ p.211
"데이비드 툴란은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관심을 넓혀 그것에 식물과 동물, 공기와 물과 토양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종들 가운데 있는 하나의 종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동시에 지구의 미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자연을 홀로 내버려두는 것은 전혀 실행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이제 도덕성은 기후 변화, 수산업의 실태, 지구 열대우림의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p.210
"하느님의 성령은 언제나 친교의 성령, 곧 우리 인간 자매 형제들과 피조물 전체와 나누는 친교의 성령이시다. 생태 운동, 특히 지구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운동, 여성의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는 여성 운동 등 우리 시대의 위대한 운동들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운동들에서 한몫을 하는 인간의 모든 실패와 죄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들은 하느님의 성령이 힘있게 일하며 우리를 해방과 희망의 운동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 자리다."
p.218 ~ p.219
"지구 생명체의 번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신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하나의 소명에서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차원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생태적 회심은 가난한 이들의 편으로 회심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그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편으로 회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태적 회심에는 정치적 회심과 신비적 회심이 있어야 하며, 정치적 회심에서 신비적 회심을 발견해야 한다."
p.220
"”풍요로운 삶“의 단순성으로 회심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는 체험. 그 삶에서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필수적인 의식주, 의료, 교육 기회, 사랑이 깃든 관계, 의미 있는 노동, 한층 창의적이며 영적인 삶, 벗들과 함께하며 우리 주변의 자연세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p.220
"지구 공동체의 피조물에게 헌신하는 체험. 이 헌신은 우리가 독선과 자기만족의 경향을 넘어서게 하고, 일생에 걸친, 사실상, 영원한 헌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완전한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p.224
"창조주 성령은 모든 피조물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현존이며 계속적 창조의 모든 진화 과정에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이 영은 피조물의 자기초월과 새로운 것의 창발에서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힘이다."
p.22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적 실천의 신비체험이다. 정치와 신비체험은 함께 간다. 생태적 실천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세계의 무한한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뿐만 아니라 상실과 실패, 좌절이라는 고통스러운 어둔 밤 그리고 지구와 지구의 피조물들에 대한 지속적인 평생의 헌신에서도 하느님을 찾는 신비가 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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