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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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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食性 人間

유원

하나 뿐인 마음 2025. 5. 14. 10:56

백온유 지음. 창비.

 

나는 얇은 오답 노트를 가방에서 꺼내어 수현에게 바람을 부쳐 주었다. 
나는 이러려고 기다렸구나.

이 정도만 할 수 있구나.

 

청소년 소설은 아리다. 자꾸만 내 생각을 하면서 '원이도 이렇게 일찍 겪으며 크고 있구나.' 했다. 

원이의 마음을 따라가면서 그 옆에 고등학생이었던 나를 슬며시 놓아두고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상실로 규정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던 수많은 '원'들.

이러려고 기다렸구나, 이 정도만 할 수 있구나에서 피어나는 감정은 실망이 아니라 안도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야 시작해 볼 수 있겠다 싶은 설렘일지도.

"아빠가 지금까지 신경 썼던 건 그런 것뿐이지?
아저씨가 자기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하는 것?"
아빠는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가 계속 아저씨를 그렇게 대하면,
나는 내가 다 망쳐 놓았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이제부터는, 제발 그러지 마."

 

그 사람의 몫은 그 사람의 몫으로 남겨줄 줄 아는 것. 그것은 존중.

잘해주(려)는 마음들이 때론 치유를 더디게 만든다. 나도 그랬다. 무엇보다 그런 마음, 잘해주려는 마음을 가면을 쓰기 쉽다.

아무리 부드럽고 예쁘다 해도, 상처 위에 반창고를 너무 꼭꼭 붙여놓으면 상처가 보이지만 않을 뿐,

더디게 아물거나 오히려 더 곪아간다. 그리고 그 희미한 자국에는 나만이 알아차리는 감각이 새겨진다.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그 시절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이 문장을 봤었더라면, '높은 곳만 그런 줄 알아?' 하며 속으로 혼자 투덜거렸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솔직하게... 생각이 아니라 인정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뱉지 못할 외침들이 가슴속에서 자꾸만 쿵쾅거리고 도무지 뚜껑을 닫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때. 안간힘이 나를 덮치던 그 시절.

이제는 이 문장이 있는 그대로 다가온다.

그래,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가 용기가 필요하지. 그 용기로 발꿈치를 들 수도 있고, 다시 내려올 수도 있고...

 

원이를 따라, 원이 곁의 수현을 따라, 저만치 뒤에서 따라오는 정현을 따라 걸었으니

오늘은 나도 마스터키를 손에 꼭 쥔 채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감각'이 있는 흉터를 지그시 눌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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