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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본문
발터 카스퍼. 허찬욱 옮김. 분도출판사.
며칠 전 친구 수녀와 1시간이 넘도록 통화를 했다. 둘 다 노안이라 카톡으로 설명하기가 번거로워서 차라리 말로 하자 싶어 통화를 했는데 이런저런 넋두리로 이야기가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말,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 시간을 무사히 잘 견디고 싶어.". 해볼만큼 해봐서 시큰둥해진 것이 아니라 순응이 가장 큰 용기임을 아는 시간, 가장 좋은 것을 바치는 봉헌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를 바치는 봉헌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일 것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려고 계획하고, 온 맘으로 매진하려고 노력 또 노력하기보다,
그날그날 만나는 사람, 해야 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나의 계획 없이 매일의 그분 부르심을 잘 알아듣고 순순하게 따라나서는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그리고... 수많은 기도를 공부하고 알고 또 가르쳐 주기보다
주님의 기도 하나만이라도 온전하게, 매일, 온 마음으로 바치고 싶다.
p.14 ~ p.15
"어떤 말도 그 말의 기원만 따져서는 안 됩니다. 모든 말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모든 말은 그 말의 영향사影響史(Wirkungsgeschichte) 안에서 해석되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영향사는 신약에서 시작하여, 교부들의 해석, 기도와 전례의 역사 그리고 다양한 교회의 신학 역사 안에서 계속됩니다."
p.17
"우리에게 도전이 되려면, 그 도전은 먼저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무리 정확히 번역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입니다. 신앙과 이해, 신앙과 사고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p.18 ~ p.19
"기도의 언어는 고유한 특성을 지닙니다. 기도는 가르치는 글도 아니고, 하느님 앞에서 늘어놓는 하느님에 '관한' 말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향해' 드리는 말입니다. 기도는 신앙 조문의 요약도 아니고, 윤리적 계명을 모은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오히려 우리가 하지 않은 것, 즉 태만히 한 것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나쁜 일을 탄식하며 고백하게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에 이끌려 하느님을 향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일을 하느님의 손에 맡깁니다. 이제 우리에게 우리의 일을 해 나갈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상의 걱정과 곤경 속에 질식하고 말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우리를 더 넓은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시편 18,20)."
p.18
"주님의 기도는 수많은 사람의 삶의 여정에 함께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이라야 주님의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해석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제자들에게 전해 준 이 기도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기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p.19
"기도하는 이는 인간의 언어와 개념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불완전한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시고, 그 기도를 드리라고 권유하셨습니다."
p.24
"성경의 하느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돌보시는, 아버지이자 어머니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가 지상의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완전한 방식의 아버지이십니다(마태 5,48; 루카 6,36)."
p.26
"성숙한 인간은 하느님을 자유로이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로이 하느님을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자유로이 우리의 청을 당신께 드리길 원하십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두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도, 하느님은 우리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p.28
"주님의 기도는 개인과 가족, 민족과 문화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만 하느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매일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되는 고통받는 사람들, 고난과 불행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들 모두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p.29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합 니다. 굶주린 이, 기아와 전쟁에 고통받는 사람, 수감자, 난민,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 죄인, 절망에 빠진 사람,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지도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선하고 올바르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1티모 2.2). 주님의 기도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께 바치는 이 세상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p.31
"성경 주석가들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부를 때 사용한 아람어 압바(abba)가 단순히 유아들이 사용하는 아빠와 같은 뜻이라고 손쉽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압바라는 호칭에는 오히려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p.32 ~ p.33
"구약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느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심은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요.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심은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 자녀로 받아들이신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입니다."
p.32
"우리는 아버지라는 호칭에 신뢰와 존경을 담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도 이 호칭에 신뢰와 존경을 담아야 합니다. 의식 없이 함부로 아버지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기도 전에 하느님의 현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 앞에 서게 됨을 의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p.34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들을 한데 묶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하시오"(마태 6.9: 루카 11,2).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관계가 어떤 관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고 특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이시며 여러분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이시며 여러분의 하느님이신 그분께로 올라" 갑니다(요한 20,17)."
p.41
"예수님은 기도의 전반부에서 일상의 요구를 넘어서는 넓은 지평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 개개인의 요구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우리의 시선이 중요한 한 가지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 안에서 우리를 더 넓은 곳으로 이끄십니다(시편 18,20)."
p.46
"적시에 사용된 적절한 단어가 현 상황을 좋게 바꾼다는 것도 알고, 반대로 나쁜 단어가 상황을 나쁘게 만든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침묵 속에 가라앉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불러야 합니다. 하느님에 관해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말함으로써 하느님을 이 세계에 현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습니다."
p.47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인 실재를 뜻합니다. 존재는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현존재(Da-Sein)를 뜻하기 때문에, 모세가 들은 대답은 '나는 여기에 있는 존재다' 혹은 '나는 여기에 현존하는 그런 존재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탈출 3,13-14)."
p.53
"세상에 거룩한 전쟁은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선 안 됩니다. 개인적 • 정치적 • 경제적 이익을 교묘히 감추고, 그것을 신의 이름으로 관철하려는 것은 정말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p.55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계명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길 바라는 하나의 청원입니다."
p.59
"인간은 경외심이 사라진 세상, 사람들 간의 경외심과 존경심, 신중함과 예의가 사라진 세상에서 더는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인간의 삶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가치가 존중받아, 곤궁과 핍박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하느님의 놀라운 작품이며 모든 인간의 공동의 집인 피조물 전체를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겠다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다." 2세기말 리옹의 주교이자 위대한 교부 이레네우스의 말을 되새깁니다."
p.74 ~ p.75
"정치나 종교적 신념에 함몰된 이들이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 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언제나 폭력으로 끝났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 세우려 했던 것은 천국이었지만, 만들어 낸 것은 결국 지옥이었습니다."
p.89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실 때, 우리의 존재를,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진지하게 여기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왕국을 짓는 데 사용하는 일개 벽돌이나, 짐이나 짊어지는 가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협력자로 부르십니다(1코린 3,9; 2코린 6,1)."
p.89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가 하는 소임 안에서 당신의 뜻이 드러나도록 기 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p.90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도 힘들지만,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p.95
"양식은 자연에서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인간 공동체의 기본적인 선에 참여하길 바라는 우리의 사회적인 요구도 담고 있습니다."
p.100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에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굶주리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p.100
"이 문제는 가난한 이에게 음식을 주거나, 음식을 사도록 돈을 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입니다. 이 존엄성은 사람이 양식과 재화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여 제힘으로 양식을 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은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직업을 찾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삶에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세상의 재화는 모든 이를 위해 있
어야 합니다."
p.102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마태 6,33) 찾으라는 말씀은 곳간에 쌓아 둘 게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의 부를 쌓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잊어버리는 부자들, 가난한 이가 찾아와도 빈손으로 돌려보내 계속 굶주리게 만드는 부자들 말입니다."
p.102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나에게 내 빵을 주시길‘ 청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빵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빵은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빵입니다. 우리가 공정하게 나누어 먹어야 하는 빵입니다."
p.107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의 빵을 향한 굶주림,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찬례를 통해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십니다."
p.107
"교회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굶주린 이를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사회 발전과 사회복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의 빵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소홀히 한다면, 이는 교회 본연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p.109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인간의 현실과 곤궁을 한 단계 더 깊이 드러냅니다. 그 기도는 인간 실존의 심연으로 우리를 이끌며, 동시에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뜻, 그 끝없는 자비의 심연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p.112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한 개인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족, 민족, 온 인류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 가족과 민족, 교회와 인류를 짓누르는 죄악의 역사에 우리도 속해 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 역사와 관련 되어 있습니다. 그 죄악의 역사는 우리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
p.113
"우리는 이미 일어났거나 지금 일어나는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에 개인적인 책임은 거의 지지 않습니다. 연대책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지려는 연대성은 있어야 합니다."
p.121
"타인의 잘못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이를 용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은총입니다. 용서는 고통받는 이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용서는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생각의 감옥에서 풀려나게 합니다. 용서하는 이는 더는 내면의 분노와 격정, 원한과 상처에 함몰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과 복수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상처는 치유됩니다. 상처를 계속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나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나 좋은 일이 아닙니다."
p.124 ~ p.125
"유혹이라고 하면 흔히 성적인 유혹을 생각하지만, 더 나쁜 것은 이웃 사랑에 반하는 행동을 할 유혹입니다. 다른 이를 손해 보게 하면서 교묘히 자신의 이익을 탐하려는 유혹, 우리를 이용해 먹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유혹 등입니다. 이는 대단한 행동이 아니라 날카로운 독설로도 이뤄집니다. 우리가 주변 이야기 를 나쁜 의도로 떠벌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을 좋게 만들고 반대로 타인을 나쁘게 만드는 유혹, 타인을 비난하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이를 괴롭히는 권력에 대한 유혹과 권력 남용, 그리고 돈에 대한 유혹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유혹에 빠지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유혹들 안에 살고 있습니다. 유혹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p.127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모상에 따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책임과 자유가 바로 인간의 위대함이자 존엄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셨다고, 시편 저자는 노래합니다(시편 8.6). 인간은 잘못 만들어진 창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놀라운 기적과 같은 작품입니다."
p.136
"세상에 적응한다는 명분으로,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위해 결단해야 할 자유를 자유방 임이라는 세속적인 자유와 혼동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