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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라디오 본문

雜食性 人間

아무튼, 라디오

하나 뿐인 마음 2025. 5. 7. 14:57

이애월 지음. 제철소.

 

나는 언제까지 라디오를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에도 클래식 FM을 들었다. 지금 우리 공동체는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아침 식사 시간에 클래식 FM을 듣기 때문이다. 운전할 일이 많았던 공동체에서는 운전할 때마다 라디오를 들었다. 하지만 채널을 돌려가며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서 들었던 시절은 중학생 때이다. 공부할 때는 음악을 듣지 못하는 타입이라 밤을 버텨야 하는 때 공부하는 틈틈이 라디오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자정 12시 넘어 튼 라디오에서 '제5공화국'이라는 제목의, 성우분들이 연기하는 드라마도 나왔었는데 음악 프로가 아닌 것이 신기해서 괜히 열심히 들었던 기억도 있다. 

 

라디오에 대한 나의 추억은 별볼일 없긴 하지만, 이 책은 중학생 시절의 라디오보다 더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아무튼 시리즈가 아니라 응답하라 시리즈의 책버전 같은. 무언가에 빠져 깊이 사랑해 본 사람, 그 사랑에 홀리기도 하고 치이기도 하며 오랜 시간을 동고동락한 사람의 삶이,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높은 창틀에 올려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기 위해 벽에 기댄 채 까치발로 서 있던 중학생 시절로 나를 데려갔다. 꿈을 꾸고 궁금하고 열심하고 순수하던 시절로...


p.57
"과함이 있으면 미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과유 불급'의 뜻을 제 맘대로 해석해온 나는 과몰입러(무언가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 의미 부여 중독자답게 8월 6일 술자리를 '볼리비아와 자메이카의 독립을 축하하는 파티'이자 '량쯔충(양자경), 앤디 워 홀, 노무현 탄신일인 동시에 천경자 화가 기일을 기념과 추모'하는 파티라 명명한 뒤 남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멋있어! 완벽해! 완전 맘에 들어!!!)."

p.66 ~ p.67
"내가 최선을 다해도 반 드시 결과가 좋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어떨 땐 원래의 노력과 다르게 나쁜 결과를 갖고 오기도 한다는 사실은 내 삶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완벽주의자를 지향하는 나는(완벽주의자가 아니고, 완벽주의자이고 싶은 사람) 원고를 한참 붙잡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쳐서 생방송 직전까지 고치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내가 그런다고 해서 반드시 완벽하거나 좋은 결과가 돌아오는 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은 이후로 팀원 모두가 일에 지장받지 않을 안전한 시각까지 원고를 정확히 보내는 혹은 미리 원고를 보내놓는 작가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글을 잘 썼든 못 썼든 시작된 생방송은 반드시 끝이 있고, 그날의 방송은 지나간다. 오늘의 원고가 성에 차지 않으면 내일의 원고에 좀 더 열심을 다해보자는 마음을 갖는다. 요즘은 심마니분들도 산삼만 캐는 건 아니라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산에 들어가는 심마니분들도 송이나 석이버섯도 채취하고, 나물만 캐서 내려오는 날도 있다는 것과 비슷한 얘기리라."

p.71
"마치 귀에 음악 소리를 내는 벌레라도 들어온 것처럼, 그 벌레가 귀에서 나가지 않는 것처럼 특정한 노래나 멜로디가 귓가에 맴도는 현상을 두고 '귀벌레 증후군(Earworm Syndrome)'이라 말한다. 예전에는 그런 음악을 곧이곧 대로 '중독성 있는 음악'이라고 했고, 한때는 '훅송 (Hook Song)'으로, 또 어떤 때는 '수능 금지곡'이라 부르더니 언젠가부터는 '귀벌레 증후군'이라는 말에서 떨어져 나와 '귀벌레 음악'이 되었다. 듣고 난 뒤에 하루 종일 귓속에서 맴돌아 심지어 입으로 종일 흥얼거리게 되는 그런 음악."

p.118 ~ p.119
"진작에 박차고 나가고도 남을 일자리인데 마 치 물그림자처럼 허상 같기만 한 이 직업을 왜 20년 넘게 해왔나 나조차도 의아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안다.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이 일을 사랑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나를 두고 한 선배는 "일을 너무 재미있어 하는 사람 특유의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다니면서, 이렇게 즐거운 일을 하는데 돈도 주다니 완전 너무 신나 그런 에너지를 막 뿜었지"라고 했다."

p.122 ~ p.123
"트라우마가 있다는 건 마음에 해결되지 못한 슬픔이 있다는 뜻이다. 받지 못한 사과가 있다는 뜻이다. 그토록 사랑해온 라디오에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그때 나는 매일 고요 속에 서 그저 가만한 하루를 보냈다."

p.152 ~ p.153
"일이 고될 때면 방송국 사람들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실 일하며 나를 힘들게 한 것도 그들이었으니까. 그럴 땐 내 라디오를 듣는 누군가가 힘이 되어주었다. 그 무렵 나에게는 내 프로그램이나 내 프로그램이 속한 라디오 채널을 고정해두고 듣는 가게들을 선으로 연결해서 만든 '동네 라디오 프롬 나드(산책길)'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 마을버스에서 두 정거장 먼저 내리면 바로 보이는 세탁소에서 거리까지 들리도록 틀어둔 라디오를 들 으며 걷기 시작한다. 라디오를 들으며 일하는 사장님이 있는 수선집에서 골목으로 꺾어 라디오 소리를 따라 과일가게까지 쭉 걸어가면 라디오를 배경 음악으로 켜둔 병원 건물이 나온다. 병원을 반환점 삼아 돌아서 다시 절반쯤 되짚어 오면 집에 당도했다. 기진해졌다가도 천천히 30분쯤 걸리는 이 '라디오 프롬나드' 산책 덕분에 나는 '이 맛에 내가 라 디오 일을 하지' 하고 힘을 냈다."

p.159 ~ p.160
"어느 순간 사람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서 탁월 한 결과를 내고 있는 AI가 가장 못하는 게 바로 공감과 위로라는 말은 다소 안심이 된다. 공감과 위로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최후의 덕목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가장 열심이고 싶고, AI에게 절대 내어주고 싶지 않기도 하다. 누군가 이야기하고 싶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말하고 싶은 곳에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답이 필요한 것 같으면 답을 주고, 모른 척해야 할 것 같으면 그냥 읽고만 마는, 얼굴은 모 르지만 늘 거기 있는 사람으로. 이게 내가 라디오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직업인으로의 다정, 그리고 이 사회에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나의 선의."

p.163 ~ p.164
"생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 좋다. 인생의 어떤 부분은 나만이 올곧이 견뎌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평생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생의 부분이 있음을 아는 사람. 하여 영원히 외롭지 않을 어떤 관계를 추구하기보다 때로의 관계나 만남이 주는 온기에 기꺼이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때문에 나는 '당신은 영원히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보다는 '우리는 내내 외로울 것이나 때론 어떤 존재와 온기로 생의 고독을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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