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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 본문

하루하루 부르심따라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

하나 뿐인 마음 2024. 8. 27. 13:40

 

또 짐을 정리했다. 살아온 흔적도 정리하고 떠난 이후에도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구석구석을 살폈다.

다시 온 곳이기에 여느 본당보다 더 정든 곳이지만 후회 없이 살았기에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왔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쉽지 않다고 말할 만큼 열심히 살았고 마음이 참 가벼웠다.

 

이 성당에 다시 와서 기도나 묵상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이다.

이곳에 와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동창들의 자녀들도 보았고, 부모님이 하느님께 돌아가시는 것도 봤다.

가장 열심히 살았으리라 기억하는 교리교사 시절,

함께 신앙학교를 준비하고 피정도 하던 학사님을 주임신부님으로 만났다. 

함께 성경 공부를 하던 선배와 후배들도 만났다,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들을 이렇게 엮어 놓으신 하느님을 생각할 때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는 말씀을 떠올렸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생각한 시작보다 훨씬 앞선 시작,

정말 우리들의 시작이셨다.

 

다시 이곳에 와서는

떠날 무렵 뱃속에 있던 아이가 태어나 복사를 서는 모습도 봤고, 

첫영성체를 하던 꼬꼬마가 군대를 다녀와 교리교사를 하는 모습도 봤다.

청년이었던 아이들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모습도, 고등학생이던 아이가 어엿한 아버지가 되는 모습도 봤다.

무엇보다 많은 어르신들이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조금씩 예수님 발치까지 나아가셔서 품에 안가시는 모습도 봤다.

혈육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은 마음으로 울고 웃으며

기쁘게 기도하고 마음 아파하며 기도했다.

앞으로의 시간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들의 마침도 하느님 안에 있으리라는 확신은

시작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우리 모두를 아우르는 그 시작이신 분 앞으로 나아가

우리 모두가 마침을 이루리라는 확신.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 안에

우리들의 시작과 마침이 있다는 평화.

 

이곳 성당 십자가는 크고 가깝다.

어쩌면 만질 수도 있겠다 싶을만큼 그리 높지 않아서 눈을 들어 바라볼 필요도 없다.

늘 가까이 보이고 선명하신 예수님.

하지만 이 예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십자가 아래, 예수님의 발치까지 나아가야지만 가능하다.

지금 내가 선 곳을 떠나고 떠나서, 지금 내가 지닌 것을 내려놓고 또 비워서,

그분께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서 십자가 바로 아래까지 갔을 때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사실 십자가 바로 아래까지 가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삶. 발치 바로 아래까지 다가서는 삶.

그곳에서 우리 모두 다시 만나리라, 우리의 마침이신 분의 품 안에서.

 

새로 시작하는 소임은

한없이 퍼줘야 하는 일이다.

3년 동안 내 샘을 고요하게 잘 채웠으니,

퍼주고 퍼줘도 될만큼 받았으니,

내어줄 일만 남았다.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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