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깊이에의 강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본문

雜食性 人間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하나 뿐인 마음 2024. 8. 11. 17:46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결론이 아니라 태동. 과정. 경유한 원인까지를 사유하고 글로 쓴 이야기. 
나도 어떻게든 기억하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계속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챕터별로 끊어서 독서모임에서 다뤄봐도 좋겠어.


p.27
"모든 새로운 혁명마다 낡은 정치 질서가 다시 살아남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성정체성의 개념 변화가 필수이다. 우리는 과거의 글쓰기에 대해 알아야 하고, 우리가 이제껏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전통을 물려주는 대신 우리를 향한 전통의 장악력을 깨뜨려야 한다."

p.27
"모든 새로운 혁명마다 낡은 정치 질서가 다시 살아 남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성 정체성의 개념 변화가 필수이다. 우리는 과거의 글쓰기에 대해 알아야 하고, 우리가 이제껏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전통을 물려 주는 대신 우리를 향한 전통의 장악력을 깨뜨려야 한다."

p.38
"나는 부분적으로는 피로 때문에, 분노가 억눌리고 자신의 존재와 접촉을 상실한 여성의 피로 때문에, 또 부분적으로는 타인이 끊임없이 없었던 일로 되돌려 놓는 소소한 집안일, 허드렛일, 어린 아이들의 끝없는 요구를 보살피는 일에 몰두 해야 하는 여성의 단절적 삶 때문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그나마 쓴 글은 내가 납득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 안에 서나 밖에서나 나 자신을 분노와 좌절을 알아 보기가 어려웠다."

p.84
"우리는 여성을 향한 여성의 사랑에 스캔들과 일탈의 오명을 씌우는 프로이트식 논리에서 벗어나 여성끼리의 경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여성 혐오의 태도를 배제할 때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서도 더욱 잘 이해하고 그의 시를 더욱 통찰력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p.129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어머니들, 혹은 사랑이나 필요나 돈 때문에 생물학적 어머니를 대신하는 여성들의 손에 자랐다. 역사를 통틀어 여성들은 서로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도왔다. 대부분 여성은 자매로서, 숙모로서, 보모로서, 교사로서, 수양어머니로서, 계모로서, 어린 것을 보살피고 애정을 준다는 의미에서 어머니들이었다. 부족 생활, 마을, 대가족, 어느 문화의 여성 관계망은 ‘어머니 노릇’을 하는 과정에 아주 젊은 여성, 아주 늙은 여성, 비혼 여성, 불임 여성을 포함했다. 심지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도 자신이 아팠을 때 아버지가 참을성 있게 곁을 지키며 보살폈던 기억이나, 아버지가 먹이고 씻기는 허드렛임을 한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보다 우리는 어떤 장면들, 모험들, 처벌들, 특별한 행사 등을 기억한다. 우리 대부분에게 여성은 우리 유년기 삶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 그러나 거절과 거부도 함께 - 제공했고, 우리의 원초적인 감각, 최초의 사회적 경험도 한 여성의 손과 눈과몸과 목소리와 연결되어 있다."

p.133
"나는 점점 사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꺼이 공유해야만 여성들이 진실로 우리 것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집단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 작가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거짓되고 작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통렬히 인식하고 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독자가 읽고 있는 것은 그 여자의 이야기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는-죽은 이들을 포함해- 아직 말해지지 않았다."

p.138
"사랑과 미움의 파도에 휩쓸린다. 심지어 아이의 어린 시절을 질투한다. 아이가 자라기를 희망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아이의 존재에 낱낱이 매여 있으면서 책임감에서 벗어나길 갈망한다.
보호라는 이기하고 원시적인 반응, 누구라도 제 새끼를 공격하거나 비난할 때 새끼를 방어하는 짐승. 그러나 나보다 아이에게 더 혹독하게 대하는 사람도 없다!"

p.139 ~ p.140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내겐 일종의 원이 있었다. 책 한 권을 집어들거나, 편지를 쓰려고 하거나, 심지어 열의나 공감을 드러내는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 그 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혹은 아이들)는 자신만의 꿈의 세계에 빠져 분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 세계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끼자마자 아이는 내 손을 잡아당기고, 도움을 요청하고, 타자기를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아이의 요구가 거짓이라고, 나아가 나 자신으로 살아보려는 단 15분조차 내게서 빼앗으려는 수작이라고 느꼈다. 분노가 솟구쳤다. 나 자신을 지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소용이 없다고 느꼈고 아이와 나의 사이가 불평등하다고 느꼈다.나의 요구는 언제나 아이의 요구와 비교당했고 늘 내 요구가 뒤로 밀렸다. 단 15분이라도 아이들과 떨어져 이기적이고 평화롭게 보낼 수 있다면 아이들을 훨씬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몇 분이라도! 하지만 좁은 공간에 갇힌 우리 삶에서 내가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라도- 벗어나면, 마치 우리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팽팽히 당겨지다 결국 끊어져 아이에게 버림받았다는 달랠 길 없는 느낌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마치 나의 태반이 아이에게 산소 공급을 중단한 것처럼. 다른 수많은 여성처럼 나는 아이 아빠가 직장에서 돌아오는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집 안에 다른 어른이 있으면 적어도 한두 시간은 엄마와 아이를 둘러싼 원이 느슨해지고 우리 사이의 격한 감정도 느슨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원이, 우리가 사는 이 자기장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이 깊고, 감정으로 가득 찬 이 형식 속에서 내게 주어진 어머니라는 역할은 밀물과 썰물처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로 보였다. 그리고 이 형식 때문에 -내 아이들과 내가 아주 작고 사적인 감정의 무리를 이루었던 소우주, (날씨가 나쁘거나 누가 아프면) 때때로 며칠 동안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어른을 못 보고 지나갔던 그 소우주 때문에 - 내가 아이에게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 내게 괜한 요구를 했던 아이의 행동 아래에는 진짜 요구가 정말로 존재했다. 아이는 나라는 개인에게 자신을 위한 따뜻함과 애정, 지속성, 신뢰가 여전히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애의 엄마라는 이 세상에서 나의 유일한 고유성은 -아마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더욱 희미해질 것이다 - 어떤 인간도 만족시킬 수 없는 광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을 만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이, 무조건적으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종종 한밤중에도 사랑해주는 것뿐이었다."

p.141
"우리 사이의 공통점인 시 때문에 모였지만,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분노에서 또 다른 공통점을 발견한 여성들의 언어로 말했다. 이제 우리는 그 언어로 말할 수 있고 글로 쓸 수도 있다. 금기가 깨지고 있고, 모성의 가면에 금이 가고 있다."

p.147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두려워했던 죽음은 평생 사투를 벌여 겨우 힘겹게 세상에 내놓은 나의 얼굴, 인정받을 만한 자율적인 자아, 시와 삶의 창조가 허물어지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p.149
"마치 어머니의 고통, 여성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어머니 역할로 보는 인식이 인간사회의 감정적인 토대에 너무나 필수적인 나머지 그러한 고통과 정체성을 줄이거나 없애자는 주장은 가능한 모든 면에서 반박하고 싸워야 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p.151
"둘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던 갈등과 전투의 감각을 기억한다.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를 겨루는 싸움에서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가자였다. 이것이 내겐 일곱 살이 안 된 아이 셋을 키우는 일의 의미였다."

p.159
"육아 심리학에서는 아이를 위해 ‘아이를 놔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도 그래야 하며, 어쩌면 아이보다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아이를 놔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겐 다시 돌아갈 자신이 필요하다."

p.162
"나는 엄마가 된 사실 때문이 아니라 엄마 됨이라는 제도 때문에 나의 진짜 몸과 정신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음을 깨닫는다."

p.207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확장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이는 그저 어린이 책이나 영화, TV, 교실에서 보여주는 여성을 깎아내리는 이미지와 싸우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p.228
"토큰 여성은 대다수 여성과 달리 특별한 재능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광범위한 여성의 현실과 분리해 스스로 ‘보통’ 여성과 다르며, 심지어 실제 모습보다 더 강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부추김을 당합니다."

p.300
"살다 보면 그 순간 곧바로 배신임을 알게 되는 배신을 저지를 때가 있다. 그 일도 그랬다. 그 일 말고도 너무 반복적이고 일상적이어서 어떤 기억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오직 비참함과 점점 무뎌지는 자기혐오의 찌꺼기만 쌓이는 배신도 있었다. 이런 배신은 말이 아니라 침묵의 형태를 띨 때가 많았다. 반여성적인 농담이나 인종차별적 농담, 반유대주의 농담을 하며 다들 웃는 앞에서 침묵하기. 침묵하고 나서 망각하기.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이, 그 용기와 웅변으로 우리를 감동하게 한 사람이 억압자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못 들은 척하기. 저 사람이 정말로 그럴 의도는 없었어. 진짜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어. 그러나 배신은 주전자 속의 일처럼 눈에 보이지 않은 채로 쌓이고 쌓여간다."

p.304
"나의 지성과 재능에 대한 아버지의 투자는 자기중심적이었고 독단적이었고 독재적이었으며 끔찍할 정도로 소모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 노력의 힘을 믿고, 쉽게 찾아오는 영감은 믿지 말며, 쓰고 또 쓰고, 한 사람의 여성이지만 내가 정말로 글 속의 화자인 것처럼 느끼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가르쳤다.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 덕분에 나는 언어의 힘과 언어의 힘을 공유할 수 있음을 느꼈다."

p.316
"그러므로 이 글에도 결론이 없다. 내게는 또 다른 시작이다. 1982년 우경화된 미국에서 나도 노란별을 달겠다고 말하는 방식만으로는 안 된다. 책임과 책임 범위의 확대를 향해 움직여야 한다. 남은 생애 동안, 다음 반세기 동안, 내 정체성의 모든 면이 전부 개입되어야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정체성들 말이다. 특권을 얻고 싶으면 복종을 바치라고 배운 백인 중산층 여자아이. 이성애자 기독교인으로 길러진 유대인 레즈비언. 흑인 인권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억압이 호명되고 분석되는 것을 들었던 여성. 남성 폭력을 증오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세 아들을 둔 여성.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여성. 피 흘리는 사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멈춘 여성. 아름다운 언어도 거짓 말을 할 수 있고, 억압자의 언어가 때로는 아름답게 들릴 수 있음을 아는 시인. 저항의 일부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 는 여성."

p.345
"시몬 드 보부아르와 제임스 볼드윈을 읽으며 나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의 구체적인 현실이 얼마나 꾸준히 스며들어 상황을 소모하는지, 또한 그 현실이 무력의 사용뿐만 아니라 문화를 통해서도 유지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雜食性 人間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0) 2024.08.22
이게 다예요  (1) 2024.08.21
단명소녀 투쟁기  (0) 2024.08.10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0) 2024.08.10
나는 가장 슬픈 순간에 사랑을 생각한다  (0) 2024.08.1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