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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서사의 위기 본문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다산초당.
읽긴 다 읽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p.22
"정보사회는 정신적 고도 긴장의 시대를 열고 있다. 정보의 본질이 다름 아닌 놀라움의 자극이기 때문이다. 정보의 쓰나미는 우리의 지각 기관을 지속적으로 자극한다. 우리의 지각 기관은 더 이상 관조적 상태로 전환되지 못한다. 정보의 쓰나미는 주의를 파편화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기와 귀 기울이기에 필요한 관조적 머무름을 방해한다."
p.22
"귀 기울여 듣기의 능력은 갈수록 사라진다. 몰아의 상태로 경청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생산 하며,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p.23 ~ p.24
"벤야민 이후 한 세기 동안 정보는 신新 존재형식Seinsform, 즉 신 지배형식으로 변해왔다.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정보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이 억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혹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스마트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명령이나 금지로 작동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침묵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마트한 지배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로 걸라고 요구한다. 이때 자유는 억압되기는커녕 철저히 혹사된다. 자유가 결국 통제와 제어로 전복되는 것이다."
p.24 ~ p.25
"현대인은 정보와 소통에 도취되어 몽롱하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소통의 주인이 아니다. 의식된 통제로부터 벗어난 정보의 교류에 몸을 내맡긴 상태다. 소통은 점점 더 외부에 의해 유도된다. 자기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알고리즘으로 조종되는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예속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블랙박스의 손에 내맡겨진다. 인간은 제어하고 착취할 수 있는 데이 터 기록으로 축소된다."
p.24
"스마트한 지배는 그 존재를 특별히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 우 효율적이다. 이들은 자유와 소통의 탈 속에 숨어 있다.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거는 동안 우리는 흐름에 예속시킨다."
p.30
"경험은 전승과 연속성을 전제한다. 경험은 삶 을 이야기될 수 있도록 만들고 안정화한다. 경험이 사라진 곳, 즉 구속적이거나 지속적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에는 벌거벗은 삶, 즉 생존의 삶Uberleben 밖에 남지 않는다."
p.38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현시점에서 다음 현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 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생존을 위해 마비된다.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p.43
"인간은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즉 순간에 예속된 존 재가 아니다. 인간의 실존은 출생과 사망 사이의 전체 시간에 걸쳐 있다. 외부지향성이 부족하고 존재에 서사적 닻을 내리지 못하므로, 모든 사건과 사태를 관통하고 감싸는 생동성 있는 단위로서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적 폭을 수축시킬 수 있는 근력 이 자기das Sebst로부터 나와야 한다. 존재의 지속성은 자기의 지속성에 의해 보장된다. 이 자기의 지속성은 시간의 파편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중심 시간 축을 형성한다."
p.45 ~ p.46
"디지털화는 시간적 위축증을 악화시킨다. 실제성은 좁은 현실 폭을 가진 정보로 부서진다. 정보는 놀라움의 자극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정보는 시간을 파편화한다. 주의도 파편화한다. 정보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속화된 정보 교류 속에서 정보는 또 다른 정보를 사냥한다. 스냅챗은 디지털로 이루어지는 찰나의 소통을 몸소 보여준다. 이러한 메신저는 디지털의 시간성을 가장 순수한 형식으로 드러낸다. 오로지 순간만이 중요하다."
p.71
"프루스트에 따르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삶에 몰입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사건들을 잇는 새로운 실을 뽑아낸다. 그럼으로써 고립되지 않 은 관계들로 이루어진 조밀한 망을 형성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유의미해 보인다. 이 서사 덕분에 우리는 삶의 우연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p.83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정보의 관점에서 먼저 인식한다. 정보에는 먼 거리도, 폭도 없다. 정보는 거친 돌풍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빛도 담지 못한다. 정보에는 아우라적 공간이 없다. 그렇게 정보는 세계를 탈아우라화하고 탈신비화한다. 그러한 순간에 언어는 정보로 수축하면서 아우라를 완전히 상실한다. 정보는 언어의 극명한 수축 단계를 나타낸다."
p.95
"얼굴은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대Du이지, 가용한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손가락으로 어떤 사람의 사진을 터치하거나 심지어는 옆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이미 시선, 즉 얼굴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라캉이라면 터치스크린에 고정된 이미지는 시선이 없는 것이라고, 나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눈요기로서만 작용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터치스크린은 그나마 시선을 투과시키는 영사막 스크린과도 구분된다. 반대로 디지털 화면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완벽히 차단함으로 써 아무것도 투과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평평하다."
p.102 ~ p.103
"이야기로서의 이론은 사물들을 관계성 안에 집어넣은 후에도 왜 그렇게 관계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질서가 있다. 이론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을 발전시킨다. 빅데이터와 반대로 이러한 질서는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고차원적 형식, 즉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사물을 개념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종결 형식이다. 반면 빅데이터는 완전히 열려 있다. 종결 형식을 띤 이론은 사물을 개념적 틀에 담은 후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적 개념과의 작별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개념 없이도 작동한다. 지능은 정신이 아니다. 사물의 새로운 질서, 새로운 이야기는 정신만이 할 수 있다. 지능은 계산하고 센다. 정신은 이야기한다. 데이터 기반 정신과학은 정신을 탐구하는 과학이 아니라 데이터과학이다. 데이터는 정신을 몰아낸다.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영점에 해당한다. 데이터와 정보로 가득한 세상은 이야기할 능력을 위축시킨다. 그 결과로 이론은 잘 구축되지 않으며 매우 모험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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