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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긴긴밤 본문

雜食性 人間

긴긴밤

하나 뿐인 마음 2021. 5. 20. 18:40

루리 글, 그림. 문학동네.

생각이 자꾸 많아지는 시간을 지나가던 어느 날 이 책을 읽었고,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라는 문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은 비가 참 많이도 왔다.

오래된 스타렉스는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사이드미러도 백미러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번져 있고 뿌연 상태. 힘차게 와이퍼를 움직여야만 겨우 앞이 보이는데 내가 가야 할 길의 경계를 그어주는 차선은 여전히 희미하다. 눈 앞의 것만 겨우 알아보면서 가는 길에선 앞차의 불빛마저 희미하다, 한참을 울면서 보내는 날엔 많은 기억들이 희미한 것처럼. 차선을 변경하고 싶어도 사이드미러와 백미러 모두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에 선뜻 핸들을 꺾지 못하지만 뒷차가 반짝 빛을 내어줄 때 그 빛에 의지해 차선을 바꿀 타이밍에 자신이 생기고 핸들을 꺾을 수 있다. 이처럼 내가 지난 삶을 돌아볼 때 과거의 ‘반짝이는 순간’이 나를 용감하게 해 준다. 과감히 차선을 바꾸어야 할 때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 차의 라이트에 무심하지 않을 힘을 내며 살아가야 한다. 언젠가의 나를 위한, 누군가의 비내리는 밤을 위한 ‘반짝이는 순간’. 그리고 나는 <긴간밤>에서 수많은 ‘반짝이는 순간’을 보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자꾸만 희미해지고 기억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을 자꾸만 되새기며 살기도 하지만, 언젠가 내가 삶을 뒤돌아볼 때 반짝이며 용기를 줄 수 있는 기억들을 만들며 살아가야겠다.


p.12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p.13
"코끼리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면 그것은 곧 싸움으로 번졌고, 싸움은 죽음을 부르는 일이었다. 코끼리는 스스로의 목숨도, 남의 목숨도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코끼리들의 지혜였다. 노든은 현명한 코끼리들이 좋았다."

p.15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p.18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p.40
"동물원 사람들이 노든의 뿔을 자르기도 했다. 코뿔소 뿔은 적당히 잘라 내기만 하면 다시 자란다. 그러니까 뿔 사냥꾼의 표적이 되어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뿔을 잘라 버리기로 한 것이다."

p.45
"그 후로 치쿠는 오른쪽 눈이 잘 안 보이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걸을 때 중심을 잡지 못했다. 게다가 오른쪽 방향을 잘 보지 못해서 다른 펭귄들이나 장애물에 부딪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윔보는 항상 치쿠의 오른쪽에서 치쿠가 중심을 잡는 걸 도와주었고, 다른 펭귄과 부딪치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치쿠는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데 적응할 수 있었고, 조금 불편하긴 해도 큰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습관처럼 윔보는 늘 치쿠의 오른쪽에 있어야 안심을 했다."

p.76
"하늘의 별을 바라보느라 노든은 알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따. 조금씩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부리가 껍질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

p.87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노든이 나와 같이 바다에 가고 싶어 한다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해 왔지, 절망을 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말없이 긴긴밤을 넘기고 있었다."

p.115 ~ p.116
"“너는 펭귄이잖아. 펭귄은 바다를 찾아가야 돼.”
“그럼 나 그냥 코뿔소로 살게요. 노든이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니까 내가 같이 흰바위코뿔소가 되어 주면 되잖아요.”
“그거 참 고마운 말인데.”
“내 부리를 봐요. 꼭 코뿔같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나는 코뿔소가 키웠으니까, 펭귄이 되는 것보다는 코뿔소가 되는 게 더 쉬워요.”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p.117
"어느 날 밤, 나는 노든의 이야기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이 노든과의 마지막 밤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의 바다를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노든의 눈을 쳐다보며, 눈으로 그것을 노든에게 말했다. 노든도 그것을 알았다."

p.124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따.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이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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