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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다 본문

雜食性 人間

사이보그가 되다

하나 뿐인 마음 2021. 5. 20. 17:54

김초엽, 김원영 지음. 사계절.

이 책과 근래에 읽은 몇 권의 책들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해 왔는지 또 한 번 깨우쳐줬다. 읽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덕분에 ‘조금 알게 된 사람’인 척이 아니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 정도는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며 그동안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자립’에 관한 이야기, 소록도 이야기가 자꾸만 생각났다. 소록도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신 분들 덕에 수십 년 동안 그들은 따뜻하게 도움을 받으며 살았지만 그 따뜻한 보호을 받는 동안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소록도에 갇혀 있었고 그곳에서 빠져나와 세상에 흡수되어 어울려 살아가는 일은 그만큼 더 늦춰졌다는 사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과 보호를 넘은 ‘자립’이라는 것. 그 책을 읽고 <나의 특별한 형제>라는 영화를 보면서 ‘자립’의 의미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고, 이 책에서는 자립을 넘어 ‘연립’을 배웠다. 돌아보니 나의 세상에서 ‘장애’와 ‘장애인’은 전공 필수 아니라 교양 선택이었고, 부끄럽게도 선택하여 들은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함만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생각하게 되고 반성하게 되고 알게 된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읽은 나는 이제 성경의 ‘치유 사화’를 예전처럼 묵상하지 못할 것 같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각적 측면의 회복에 대해 묵상하고 삶을 조명하며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

하느님을 믿는 내게 하늘 나라가 끊임 없이 미래로 유예되는 곳이 아니듯 그들에게도 ‘더 나은 삶’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p.10
"장애로 인해 일상에 불편함을 겪더라도 “일어나 걸어라” 보다는 “(걷지 않아도 좋으니) 네 방식대로 일어나라”는 주장이 합당한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p.35 ~ p.36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잘 듣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말소리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정보로 전환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한 보청기나 청력 치료제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과 그런 소통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내 삶을 실제로 개선했다."

p.36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보도블럭을 제대로 정비하고, 키오스크에 음성 안내를 포함하는 것은 미래적인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주의를 기울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흔히 사람들은 장애를 치료할 과학기술과 의학의 ‘위대한’ 발전에 기대를 걸지만,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장애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여전히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다."

p.38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p.63
"‘사이보그가 되어서’ 스스로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젠가 도래할 첨단의 기계와 결합하거나 기계 없이도 ‘정상적인 몸’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들과 더 안전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p.72
"시혜는 위계를 만든다."

p.72
"스마트폰과 달리 장애인을 위한 기술에는 항상 온정적 시선이 따라 붙는다.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한다. 우리 사회가 장애 접근성과 장애 권리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특정한 기업이나 단체가 소외된 장애인을 위해 시혜를 베푼다는 서사만이 반복되고 있다. 이 온정의 서사 안에서 기술과 실제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들의 진짜 필요는 쉽게 지워지고 만다."

p.82
"자폐인과 그 가족들은 자폐를 교정하려고만 했던 의료적, 문화적 접근이 얼마나 많은 자폐인들을 고통으로 내몰았으며,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를 증언한다. 자폐인들은 이러한 의료화에 대응하여 자폐를 신경전형적neurotypical이지 않은 뇌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신경다양성운동을 벌이고 있다."

p.86
"테크노에이블리즘Technoableism은 기술 낙관론에 기반한 비장애중심주의다. 이러한 관점은 장애를 손상된 몸을 가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그 개인에게 기술적 지원이나 교정을 통해 장애를 제거할 것을 혹은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테크노에이블리즘의 관점에서 청각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보청기나 인공 와우 혹은 청력 자체를 회복할 수 있는 의료적 시술이지, 수어통역이나 문자통역이 아니다. 수어로 의사소통하거나 음성 대신 문자 정보를 제공받는 것보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정상성 규범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다."

p.170
"장애란 단지 신체의 기능적(도구적) 역할을 결여한 상태가 아니라, 그 몸을 본 사람들이 ‘비정상’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할 때 비로소 장애가 된다."

p.208
"앨리스 웡은 환경운동가들에게 빨대는 마음먹으면 포기할 수도 있는 물건이기 때문에 편리함을 포기하고 환경을 생각하자는 운동의 시작점으로 여겨지지만, 노약자나 장애인들에게는 식음료를 섭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삶의 도구라고 말했다. "

p.251
"우리가 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면, 우리의 삶을 덜컹거리게 만드는 장애(결여)를 무조건 극복하겠다거나 완벽하게 치료해주겠다는 약속에 매달리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치료의 약속을 절박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나의 확신과 선언에 잠시 이음새를 띄울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p.278
"우리는 결함 없는 완전한 기술을 거머쥘 수 없고, 불멸에 도달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능력차별주의를 끝내는 것. 그것은 손상과 취약함, 의존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p.280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는 말은 결국 여성에게 아름다움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고, 이러한 요구는 다양한 몸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후에 ‘자기 몸 긍정’대신 ‘자기 몸 중립body neutrality’이 더 나은 방향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모든 몸의 아름다움을 찾는 대신 우리 몸이 굳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자는 것이고, 자신의 몸에 굳이 찬사를 보내는 대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자는 것이다."

p.282
"나는 모든 사람이 ‘유능한’ 세계보다 취약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제 자신으로 존재하는 미래가 더 해방적이라고 믿는다. 어떤 손상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미래보다는 고통받는 몸, 손상된 몸, 무언가를 할 수 없는 몸들을 세계의 구성원으로 환대하는 미래가 더 열려 있다고 믿는다."

p.305
"장애인 인권활동가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의 목표란 자립自立이 아니라 연립聯立을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지향하는 것이라면서, 이때 자기결정권(자율성)이란 “여러 주체들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조율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임을 강조한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 연결을 넘어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p.320 ~ p.321
"한국에서는 장애 당사자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기술이든, 기업 홍보에 치우쳐 정작 당사자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한 기술이든 지나치게 자선-시혜-온정의 시선으로 뭉뚱그려지는 경향이 있어요... 결국 한국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시혜와 온정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장애인을 위해 갖춰야 할 접근성을 사회 정의의 실현으로 보는 관점 자체가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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