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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르 1,40-45 타인이 부과하는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 본문

마르코의 우물/마르코 1장

마르 1,40-45 타인이 부과하는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

하나 뿐인 마음 2021. 2. 14. 10:37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0절) 낫게 해 달라고 엎드려 소리치며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대담하게 경계를 넘어서 예수님 앞에까지 다가갔으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낫기를 원하니 제발 낫게 해달라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담담한 어조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니,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자신의 원의를 말하지 않고 예수의 원의를 언급하는가. 오늘따라 이 나병 환자의 담담하다 못해 평온하기까지 한 (나에게 그렇게 보여지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왜 애절하게 매달리지 않나, 왜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나. 사회적 낙인이 찍힌 채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까지 넘어 그분 앞에 섰으면서도 왜 이렇게 점잖기만 한가. 

 

나병은 감염된 후 피부 괴사가 일어나서 지각이 마비되는 병이다. 몸이 망가져가는 걸 눈으로 확인을 해도 정작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느끼지 못한다. 이들이 느끼는 고통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회적으로 격리, 소외되어 자신을 죄인처럼 여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 이들은 타인이 부과하는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거취는 물론이고 유죄 판단, 정체성마저 타인들이 정해주는 대로 받아야 했기에 회복(회생에 가까우리라)마저도 자신의 원의가 아니라 타인의 원의대로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차마 '낫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라고 말했던 걸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물론 내게도 이런 아픔이 없지 않았다. 씌운 사람이 벗기기 전에는 벗어날 수 없는 아픔. 그러나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단죄하고 탓을 돌려,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고통마저 지우지는 않았나를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나는 말하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그에게 느끼셨을 가엾은 마음(41절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인간끼리 주고 받는 낙인과 굴레가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스스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인간들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내가 아팠을 때도, 내가 아프게 한 누군가에게도 느끼셨을 예수님의 그 마음. 예수님은 그의 표현대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믿었기에, 이 마음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는 예수님 앞으로 그렇게 용감하게 나아갔으리라. 

 

그의 심정,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고 나니 여태까지 예수님의 '손해'라고 생각했던 것마저 다르게 보인다. 치유된 그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렸기에 예수님은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실 수 없게 된 것을 예수님의 '손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마저도 기쁘게 감수하지 않으셨을까. 사람이 낫고 기쁨을 얻고 새 삶을 얻었는데, 예수님이 당신의 손해에 마음을 쓰셨을까. 

 

세상에는 타인이 부과하는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재력, 학력, 외모, 나이, 성별, 국적, 직업, 피부색이나 사용하는 언어마저도 잣대의 기준이 되어 불필요한 고통까지 상대의 어깨에 얹어주며 사는 세상이니 나는, 내 가슴을 치며 예수님께 가자. 곧 사순이다. 그분이 나를 깨끗하게 하시고자 하시니, 예수님 앞으로 용감하게 성큼 나아가자. 나 자신을 돌아보되, 그분을 믿으며 대담하게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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