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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食性 人間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하나 뿐인 마음 2019. 12. 17. 16:55

허수경 유고집. 난다.

전에 읽었던 허수경 시집과 또 좀 다른 느낌의 책이었다. 다음어지기 전의 속마음 같은 허수경 시인의 글들을 읽는데, 두 사람이나 아나운서였던 허수경의 책이라 짐작하고 말을 건네왔었다. 이 책도 정말 내겐 그랬다. 또 다른 사람 같았던 시인이 남긴 글.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 평생 고단하고 외로웠을 시인. 


"시간을 정확하게 해체할 수 없는 순간에 시는 온다. 어떤 시간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그 망설임의 순간에 시는 오는 것이다."

"웃어주렴, 이 편지를 받으면 그리고 만일 네게로 저녁이 오고 있다면 그럴듯한 주점에 앉아 내게도 잔을 한번 권해주렴. 부재를 위해 드는 잔만큼 넘실거리는 잔은 없다고 가만히 생각하면서."

"기대와 어긋나니 외로운 거다, 라는 말은 참 옳구나. 네가 나의 기대에 맞게 해주지 않아서 나는 외로웠던 거다. 더이상 들키지 않아야겠다. 멀리서 지켜보며 잊어버려야 할 일들을 잊어야겠다. 그리고 나의 시."

"이제 나이가 들어서 문장을 쓰고 그것 자체만을 즐기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으로 죽어갈 것이다. 너의 문장만이 너를 고독에서 구해준다는 걸 네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새벽에 일어나서 커피를 끓이고 왜 작업실로 올라오나? 문장 때문 아니었나?"

"시가 어디로 갈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으랴. 하지만 결국 어디로든 갈 것 아니냐. 볼 수 없는 많은 것이 나를 피게 하리라. 볼 수 없는 것이니 아련하고 먼 것이니."

"욕심이라는 말에 대하여 나는 그와 어젯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가 욕심에 사로잡힌 인간이라고 정의해주었다. 고마웠다. 정말 그러니까. 오래된 고독이 욕심으로 전환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오래된 고독이 사랑받고 싶은 욕망으로 변질되었다는 걸 알겠다. 이 모습을 그에게만 보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조금 더 책을 읽는 시간이 지나가면 이 욕심은 책 안으로 흩어지리라. 누군가에게 그만 써, 라거나 그만 돌아다녀, 라는 말을 모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뭘 잘못해서 이렇게 괴로운가. 딱 고만고만한 나의 재능. 나는 떠나왔다, 하는 것을 잊고 너무나 많은 기대를 한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날 붙잡고 있을 어떤 수치, 같은 것이 밀려오고 또 밀려온다. 그렇다고 그 수치심을 붙들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잊어라, 수치가 너의 영혼을 갉아먹다가 너의 주인 행세를 너의 내부에서 하기 전에."

"나이가 들면서 하나 안 것은 돌이키려고 뭔가 잘 마무리지어보려고 시도한 모든 일이 일을 더 망친다는 거다. 가만히 이 시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자. 나 스스로가 예술가로서 살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만이 나의 일인 것이다."

"오늘 나의 일은 초록이 얼마나 무성한지, 그 무성함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참혹한 시간을 살게 하는지 생각하는 것. 가을이 오면 그 시간들 앞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언어의 욕망에 시달릴 것인가."

"산문의 가장 강력한 힘은 아마도 담담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 흥분하지 않고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 능력이라기보다는 단련을 통해서 나온 인내. 사물과 풍경 앞에서 흥분하지 않기."

"시가 쓰여지는 순간은 참으로 우연하게 온다. 삶을 통과하는 모든 순간은 우연과 우연으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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