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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선량한 차별주의자 본문

雜食性 人間

선량한 차별주의자

하나 뿐인 마음 2019. 12. 18. 08:21

김지혜 지음. 창비.

'희망을 가지라'는 말조차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삶에 가치를 매기는 일이므로 모욕적인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한참 생각했다. 희망을 가져야 하는 문제인가, 사회가 변해야 하는 문제인가를 나란히 놓아볼 생각조차 못했었던 건 아닌가. 휴지 한 장 정도는 내가 버리면 될 일인데 싶다가도, 휴지 한 장이라도 쉽게 두고 가고 한 발 더 나아가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그냥 넘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고민하게 된다.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삶의 태도인 경우일 땐, '과하다' '예민하다' 더 나아가 '세다'는 평가들을 감내하고라도 한 마디 행동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매번 그 후에 나 혼자 견뎌야 하는 것들이 가볍지 않다. 내가 인내할 문제였던 건 아닌가, 희생할 마음이 부족했던 건 아닌가, 나는 그리 잘 살고 있나...라는 질문이 속에서 올라오면 더 괴롭다. 괴로운 만큼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나 자신이 '누리는 자'임을 아프게 인정하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산술적으로 내가 차졀을 당할 때가 있다면, 할 때도 있는 게 아닐까?"

"“한국인 다 되었네요.” “희망을 가지세요.” 전자는 이주민을 향한, 후자는 장애인을 향한 모욕적인 표현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되었다. 당혹스러웠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얼핏 칭찬이나 격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칭찬과 격려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말을 한 당사자에게 이런 표현이 듣는 사람에게는 모욕적일 수도 있다고 알려준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항변한다면 더이상 문제가 아닌 걸까? 모욕을 한 사람은 없고 모욕을 당한 사람만 있으니, 모욕을 당한 쪽에서 감내하거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건 나의 무의식까지 훑어보는 작업을 거친 후에야 조금이나마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소수자를 침묵시키는 방식으로는 이 상황이 종료될 수 없다. 정의에 반하는 결론이며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가 목소리를 낸다 한들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교착 상태는 마냥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합의’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

"사람들은 세상이 이미 정의롭다고 믿고 싶어하지만, 평등은 언제나 부당한 법과 체제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통해 진보해왔다. " 

"내가 속한 집단은 차별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사회라고 생각해야 안심이 된다."

"차별이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만일 당신이 권리로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권력관계가 있다. 사회 안에서 나의 위치에 따라 특권을 가지기도 한다. 돈이나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의 특권은 비교적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보통 특권이란 말이 일부 재벌이나 고위층의 권력으로 좁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특권을 일부 사람들만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특권 privilege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특권을 가졌다는 신호가 있다면 큰 노력 없이 신뢰를 얻고,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느낌들이다. 나에게 알맞게 주변 환경이 만들어져 있어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편안한 상태이다."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그렇기에 불평등에 관한 대화가 “나는 힘들고 너는 편하다”는 싸움이 되어서는 해결점을 찾기 어렵다. “너와 나를 다르게 힘들게 만드는 이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공통의 주제로 이어져야 한다."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과업이 따르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법이다."

"평등하기만 하면 모두의 삶이 쉬워질까? 대답에 매몰되지 말고 이 질문이 맞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권리와 기회를 요구할 때 그 결과로 기대하는 것은 편한 삶이 아니다. 우리는 시설에 갇혀서 남이 주는 대로 먹고 자고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으며 생애를 보내는 인생을 인간답다고 하지 않는다.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요구하는 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하면서 나름의 삶을 헤쳐나가겠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부정의를 의식하는 때는 기존에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상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변할 때이다. 만일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지고 있어 현 체제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평등으로의 진보가 그냥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옳지 않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평등을 총량이 정해진 권리에 대한 경쟁이라고 여긴다면, 누군가의 평등이 나의 불평등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실은 상대가 평등해지면 나도 평등해지는 것이 더 논리적인 추론인데도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동의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집단은 차별을 덜 인식할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실행하는 조치에 반대할 이유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국가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쳐왔지만 주류로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인식하지 못하여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진보’ 정치인을 종종 보는 것처럼 말이다."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설계된 질서 속에서 바라보면 버스의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장애인의 결함이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다. 그러니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돈을 더 많이 내는 것이 공정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는 애초에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속도와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기울어진 공정성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고정관념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이다. 이 머릿속 그림이 대상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다. 고정관념은 자신의 가치체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고백인 셈이다."

"고정관념은 일종의 착각이지만 그 영향은 꽤 강력하다. 일단 마음속에 들어오면 일종의 버그처럼 정보처리를 교란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사실에 더 집중하고 그것을 더 잘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그 고정관념을 점점 더 확신하는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반면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사례를 보더라도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전형적이자 않은 특이한 경우라고 여기며 예외로 치부한다. 고정관념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반증 사례를 아무리 제시해도 별 효과가 없는 이유이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부정적인 고정관념인 낙인stigma이 내면화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사회가 부여한 낙인을 자신 안에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개인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굳이 타인들이 노골적으로 차별하지 않아도 본인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차별적인 구조가 유지된다. 차별을 받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부족하고 열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저항을 하지도 않는다."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외부의 시선에서 시작되지만,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면서 그 집단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 그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흡수되고 이 고정관념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역량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부정적 고정관념을 자극하면, 부정적 고정관념을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부담 때문에 수행 능력이 낮아져서, 결국 고정관념대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 이런 압박 상황을 고정관념 압박stereotype threat이라고 한다." 

"구조적 차별systemic discrimination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 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고정관념과 편견이 없는 사회에서 자랐어도 우리의 관심과 적성이 정말 현재와 같았을까?"

"우리의 생각이 시야에 갇힌다.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시야가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이다. 그 성찰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질설르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토머스 포드Thomas Ford와 동료들은 비하성 유머가 마음속 편견을 봉인해제시킨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집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통의 상황에서는 사회규범 때문에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편견규범이론prejudiced norm theory이라 부른다."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생각 자체가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유머, 장난,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놀려도 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반복된다. 우리가 누구를 밟고 웃고 있는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권력관계를 간과하고 두 집단 사이의 ‘상호비하 를 같은 무게로 바라보면 오류가 생긴다. " 

"유머가 사회적 권력과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하면 유머가 가지는 힘의 차이도 짐작할 수 있다. 지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향하는 비하성 유머는 비하당하는 사람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반면 지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향하는 비하성 유머는 말하는 사람이 그 순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더 크다." 

"특히 유머로 던진 말을 정색을 하고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늘상 반복되어온 탓에 익숙해진 데다가 워낙 비일비재하여 일일이 대응하기도 어렵다. 유머와 놀이를 가장한 비하성 표현들은 그렇게 ‘가볍게 만드는 성질’ 때문에 역설적으로 ‘쉽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런 언어 공격은 인간 내면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반면, 그 말이 왜 문제인지 설명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설명할 기회의 순간은 짧다. 우리는 대개 말문이 막힌 채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친다. "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누구나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노력과 능력으로써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책임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기만 한다면 평등한 사회라고 여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불평등한 구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쏟은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 차등적으로 대우해야 정의로운 사회다." 

"능력주의는 노력한 만큼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간명하고 직관적인 신념체계다. 사람들은 이 신념체계를 뒷받침하는 이야기에 매혹된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시대의 영웅이 되는 서사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회는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에게 각별한 존경심을 보낸다. 좋은 대학에 입학한 사람, 좋은 직장에 들어간 사람으로부터 그 노력의 과정을 듣고 싶어한다. 사회의 불평등 자체를 원망하기보다 “계층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세태를 원망한다."

"능력주의 관점으로 보면 많은 불평등이 정당하게 보인다. 본인이 불리한 위치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상태를 수긍하게 된다.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집단에 대한 불이익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홈리스는 일하기 싫어한다’ ‘동남아시아인은 게으르다’ ‘장애인은 무능력하다’ ‘비만인은 자기관리를 안 한다’ 등 능력에 관한 부정적 고정관념이 만들어지면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해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능력주의 체계는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 경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든 편향된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어떤 능력을 중요하게 볼 것인지, 그 능력을 어떤 방법으로 측정할 것인지와 같은 판단은 이미 편향이 작용된 결정이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카스티야와 스티븐 버나드는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실제로 더 공정하고 행동하는지 실험했다. 만일 이들이 진짜로 공정하다면 동일한 성과를 보인 남녀 직원에게 동일한 성과급을 책정할 것이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달랐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남성에게 더 우호적이고 여성의 성과급을 더 낮게 책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능력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남성에게 우호적인 경향이 덜했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더 불공정할 수 있다니 왜일까? 자신이 편향되지 않다고 여기는 착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때 자기확신에 힘입어 더 편향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공정하다고 믿기에 더욱 편향되게 행동하는 이 현상을 “능력주의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보상이 합리적인 수준을 넘어 승자가 모든 기회와 존경을 독식하고 패자는 모든 모멸과 배제를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minorities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소수’라는 건 수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여성처럼 숫자로는 많아도 어쩐지 공공의 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이 권력은 잘 쓰이면 매우 의미 있다. 권력자를 향해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시민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부하가 상사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권력관계는 기존과 달라진다." 

"권력자 또는 다수는 싫어하는 집단을 배척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관점이 언제나 지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지위의 남용을 피하고 소수자에 대한 공정하고 적절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균형이 필요하다.”(유럽 인권재판소)" 

"사람들에게는 각자 정의가 미치는 범위, 즉 정의의 범위scope of justice가 있다. 누구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미치는 영역은 한계선이 있다. 어떤 경계를 중심으로 정의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존중받아 마땅하고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적으로 생각되거나 비인간화되고 잔인하게 대해도 된다고 느낀다. 이들은 정의가 관장하는 도덕적 세계 밖에 존재한다."

"수전 오포토우Susan Opotow의 말을 빌리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도덕적 가치, 규칙, 공정성이 적용되지 않는 외부세계에 존재한다고 인식할 때 도덕적 배제moral exclusion가 일어난다." 

"권위에 순응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세상을 위험한 곳이라고 인식”하고 “타인의 동기를 의심하며 이질적인 사람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변화를 반대하게 된다."

"법이라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결정한 결과에 소수자는 승복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꼭 그런 방식으로 시위를 해야 하냐?”는 질문은 이런 민주적 절차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나온다." 

"선거와 입법 등의 절차는 대개 다수결의 원칙을 택하는데, 이 의결 방식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려지는 결정이 소수자에게 불이익을 주고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소수자가 정치사회적으로 배제되고 고립되어 있다면 그럴 위험이 크다."

"시민은 단순히 통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때때로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는 방도가 된다." 

"자신이 이미 소수자를 위해 혹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착각으로 차별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고, 부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한다는 이런 형식적 평등formal equality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기준을 똑같이 적용함으로써 세상이 평등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방법은 평등을 실현하는 데 어느 정도나 효과가 있을까? 그래서 실질적 평등substantive equality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실질적으로 평등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불평등의 대물림을 끊는 재분배 정책도 필요하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과도 싸워야 하며, 개인들의 다양성을 고려한 제도를 만드는 등 다른 조치들이 있어야 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경제 부정의와 문화 부정의는 통상 서로 비늘처럼 얽혀 있으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변증법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은 경제적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 결과로 다시 무시당하고 배제된다." 

"경제적 불평등은 특정 집단을 열등하게 여기는 문화적 규범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는 이런 불인정과 무시에 집단적으로 대항하는 평등주의 운동으로 등장했다. ‘내 존재를 인정하라’고 외치며 사회적 편견과 모욕에 저항하고,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대우와 존중을 요구했다. 자원의 평등을 위한 물질적 분배 요구와 함께, 추상적으로 보이는 사회적 관계와 문화의 변혁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

"인정은 단순히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 즉 차이에 대한 인정을 포함한다. 집단의 차이를 무시하는 ‘중립’적인 접근은 일부 집단에 대한 배제를 지속시킨다. ‘중립’이라고 가장된 입장은 사실 주류 집단을 정상으로 상정하고 다른 집단을 일탈로 규정하며 억압하는 편향된 기준이기 때문이다."

"‘다르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만이 ‘다르다’고 지칭되고, 주류인 사람들은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중립’의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몇가지의 정해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개인이 행하는 차별 역시 관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어떤 말이나 행동이 차별이 되는지 그 행위를 하는 입장에서는 인식하지 못할 수가 있다. 이런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운 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부담을 준 사람을 탓할 것인지, 아니면 그 부담을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차별에 관한 논의가 과도하고 부당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평등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변화에 불편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 정말 평등을 위해 감당해야 할 변화가 현재의 불평등보다 더 부담스럽고 불편한 걸까? 다른 말로, 현재의 불평등은 우리에게 편안한가?"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아프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이유로건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 원치 않게 소수자의 위치에 놓였을 때 그 사실을 부정하며 고통을 감내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차별을 둘러싼 긴장들은 ‘내가 차별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는 강렬한 욕망 혹은 희망을 깔고 있다. 정말 결정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할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언,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방어하고 부인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해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음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 

"누가 이 평등을 향한 운동에 동참할 수 있을까? 모두가 동참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런 저항 없이 평등이 진보한 역사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위치나 지위에 관계없이 정의의 편에 섰고 소수자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었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소수자이며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정신이 세상을 변화시켜왔다.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우리가 동료 시민의 존엄성과 평등을 해치는 폭력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듯이, 차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부하는 규칙을 만들고 따르기로 약속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일상의 미세한 차별적 시선이나 행동은 규제보다는 체계적인 교육으로 바꾸고, 사회 전반을 검토하고 구조적인 차별을 개선할 수 있도록 제도적 골격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원칙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의 법률로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단순히 이해관계의 경합에서 다수가 승리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집단 간의 합의가 아니라 인권과 정의의 원칙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집단 간의 합의가 아니라 인권과 정의의 원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동의는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기본원칙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 누간가를 차별해야 한다는 다수의 주장을 수용해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적극적 조치는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언가를 ‘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적극적 조치는 특정 집단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무언가를 한다는 점에서 종종 ‘우대’ 조치로 불리며 오해를 사곤 한다. 그 조치가 없다면 불평등한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우대라고 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수소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끝도 없는 논쟁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평등을 지연시키는 논리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나에게 유리한 차별은 괜찮고 나에게 불리한 차별은 안 된다는 이해관계만 남는다. 콩 한쪽도 나눠 먹어야 한다던 풍습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종교적 교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늘날의 ‘미풍양속’은 낯선 모습의 누군가를 배척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상징이며 선언이다. "

"평등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인간 조직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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