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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탈출 13,17) #Tolle_Lege 본문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때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탈출 13,17)
멀고 고단한 길을 갈 때, 멀리 돌아가야 하는 것만큼 힘든 게 있을까. 그것이 사나흘 길을 40년이나 돌아서 가야한다면. 이 성경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 가혹한 여정'이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입회 만으로 수도자가 될 수 없었던 것, 나의 밑바닥을 몇 번이나 까뒤집어야 했던 수련 시절을 지나 지금도 이렇게 광야를 타박타박 걷고 있다. 수도자로 완성될 때는 광야를 돌고 돌아 약속의 땅에 들어서는 그 순간이 되겠지.
하느님께서 '그들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 가서는 안 되지.'하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탈출 13,17)
쉽고 빠른 길로 내달리고 싶을 때 이 구절을 떠올린다. 가는 길의 의미보다 목적지에 마음이 더 쓰일 때 이 구절을 떠올린다.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을 두고 경기를 하는데, 일부러 부딪혀 넘어뜨려 가면서 쉽고 빠르게 결승선에 다다르고 싶을 때 말이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성경 내용이고 벌써 몇 번이나 통독을 한 상태니 제목만 보고도 내용이 떠오르고 무엇을 묵상하면 좋은지 묵상 주제마저도 착착 순서대로 떠오르지만 오늘도 첫 글자부터 시작해 띄어쓰기, 마침표 하나 놓치지 않고 찬찬히 읽어내려간다. 나도 모르게 눈이 미끌어지면 아쉬워 말고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한다.
흠 없는 어린 양,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 밀가루가 부풀지 않도록 누룩 없이 구운 빵. 무엇을 바쳐야 할지 몰라 모든 것을 다 들고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종내 바쳐야 하는 것은 어쩌면 '변화된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바칠 제물이 온전히 다다를 수 있는 여정이어야 했다면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중간에 약탈 당한다 해도 다시 마련하면 될 일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되돌아설까 염려하셨던 것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마련된 제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이제는 흠 없는 순결한 마음, 첫 마음, 부풀려지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간직한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