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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선한 분노 본문
박성미 지음. 아마존의 나비.
성경을 읽다가 뒤통수를 치게 되는 구절 중 하나가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심판해야 한다."(레위 19,15)이다. 가난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는 이 새삼스러운 말씀이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어느 한 사람 혹은 부류를 두둔하지 말라는 말씀, 정의에 따라 심판해야 한다는 말씀은 '예외 없는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문제요, 그냥 우리가 살기 위해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리라.
박성미 감독이 조근조근 풀어놓은 이야기는, 이런 의미에서 감동적이었다. 그녀는 함께 살기를 고민하는 사람, 서로 만나기 위해서는 서로가 조금씩 움직이며 거리를 좁혀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 힘을 더 낼 수 있는 사람이 조금 더 움직일 줄 안다면 못만날 리 없다는 걸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수녀로서 성경도 제법 읽었고 공부도 했고 관련 책도 읽고 강의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난 세상을 좀 더 알아가면서 성경의 의미도 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기도하지 않으면 성경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세상의 그늘과 구석에 (요즘은 꼭대기도) 눈길을 주고 마음을 줄 줄 알면 말씀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말은 그 누구도 내게 해주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조금씩 깨달아 가는 이 '원리'가 들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난 내가 만나고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세상과 함께 숨쉴 때 말씀을 더 깊이 깨닫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성경도 사는 만큼 느끼고, 세상도 아는 만큼 보이고, 기도도 사는 만큼 깊어진다는 걸 말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얼키고 설켜서 여느 바깥 공동체 못지 않은 소음을 내는데, 특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위해 달려드는 사람의 '버젓해 보이는 삶'이 소박한 이들을 절망케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들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삶과 신앙 모두에서 좌절을 맛보는 이들에게 '신앙의 희망'만을 강요할 순 없는데다, 정말 나쁜 사람들을 향해 곧잘 내뱉던 '저 죄 다 받는다'라는 말도 실은 함부로 할 수 없다. 세상의 숙제가 곧 종교의 숙제다. 이 숙제를 함께 잘 풀어보자고 손 내미는 이 책을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갖고 있던 자기계발서들을 전부 처분했다. 혼자 잘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독히 일그러진 세상의 시스템에서나 나 혼자 성공한다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게 아니라 세상이 어째서 이토록 잘못되었는지 고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부와 성공 이 외에 더 중요한 게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빚을 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사는 것이다. 오로지 그거다. 나의 사랑하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소환장과 벌금을 통보받은 것도, 법이 사람보다 사유재산을 더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소환장을 통보받은 사람은 사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홀로 싸우는 외로운 노동자를 응원하러 갔고,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고 담을 넘어 들어가 사랑해요라는 피캣을 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크레인에 바람개비를 붙이고 풍등을 날렸던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로부터 소환장을 받았다.
'사람은 다쳐선 안되고, 사람의 생명은 언제 어떤 순간에서든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하다'라는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가 그 순간에 사람의 행동을 가른다. 우발절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러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내면에 '사람'이 단지 다른 규칙이나 질서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기력한 목격자가 되어 버리는 건, 특별히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악한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미친 세상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정말 나쁜 사람들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선한 사람들이 악한 시스템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기억해야할 것은, 눈치를 보는 방관자들과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 순종자들을 평범한 사람들의 대다수라는 사실이다.
생각하지 않는 죄, 옳음의 기준을 외면한 죄, 우선순위를 올바른 곳에 두지 않는 죄,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죄는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대신 사회 시스템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폭력들에 대한 책임에서 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 단지 옳고 그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 부당한 현실은 대부분 악마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악인과의 싸움이 아니다. 미개한 이들을 가르치는 싸움도 아니다. 평범한 생각들에서 우리 안의 두려움을 깨는 싸움이고, 두려움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싸움이고, 다른 이들이 어리석을 거라는 오해를 깨는 싸움이다. 양심을 가르치는 싸움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양심을 밖으로 끌어내는 싸움이다.
난 비단 희망의 버스가 김진숙을 위한, 혹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를 위한 싸움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싸움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나를 살려달라 할 때보다 저 사람을 살려달라 할 때 훨씬 크고 강한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저 사람을 위한 싸움이 바로 나를 위한 싸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내 이기심을 위한 싸움은 장벽에 부딪히면 두려움에 수그러들지만 사랑하기 위한 싸움은 밟힐수록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세상엔 우리를 욕망으로 몰아가는 힘이 있다. 돈과 권력이 그렇고, 경쟁이 그렇다. 이것을 사랑을 잊게 했다. 그 힘으로부터 끊임없이 반대 방향에 서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감으로써 균형을 잡아내는 거다. 이 중력 같은 힘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끊임없이 에너지를 다해 이 힘을 거꾸로 돌려야 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잊게 하는 것으로부터 사랑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가치를 돈의 위로 있는 힘껏 올려 놓는 것이 혁명이다.
불통 정부와 싸우거나 탐욕스런 자본가에 저항하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착취를 통해 성공한 사람들을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들과 싸우는 게 힘들었고,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는 의지들과 싸우는 게 더 힘들었고, 사람보다 돈이 더 우선이고 돈을 벌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그런 생각들과 싸우는 게 더 힘들었다. 가난과 질병은 무능력과 게으름이라는 편견들과 싸우는 게 더 힘들었다.
나도 힘들게 살았으니 너희들도 힘들게 살아야 나중에 잘 될거야 하는 값싼 위로들과 재테크와 아파트와 보험이 희망이라는 속삭임들과 경제성장을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은 필요악이라는 믿음, 내 가족 지키느라 다른 이의 가족을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무지와 싸우는 게 더 힘들었다.
사람의 희생을 발판 삼아 부를 창출한 기업들을 비판하는 것보다 그 기업들이 만든 싼 값과 할인을 좇는 욕망들 그리고 브랜드와 편한 고객서비스에 길들여진 소비에 대한 욕망들과 싸우는 게 훨씬 힘들었다.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하는 두려움들과 싸우는 게 훨씬 힘들었고 알아서 기는 자기검열들과 싸우는 게 훨씬 힘들었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살잖아, 세상은 원래 그래, 하고 말아 버리는 체념들과 싸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렇게 돈이 최고 가치가 되도록 만든 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두려움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욕망이다.
나쁜 정치인가 나쁜 자본가, 그리고 착한 시민들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전부 어느 정도는 속물이고, 어느 정도는 의인이며, 약간은 꼰대이며, 약간은 혁명가이다. 조금은 나쁜 자본가익, 조금은 싸우는 노동자이다. 불합리한 세상은 어딘가에 있는 욕심 많은 천박한 이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가진 그 약간의 부분만으로 유지되고 지탱이 되는 것이다. 나쁜 기업과 나쁜 정권과 같은 존재는, 만약 그 누구도 욕망하지 않는다면 결코 지속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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