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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 본문

雜食性 人間

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

하나 뿐인 마음 2015. 6. 20. 12:13

존 F. 캐버너 지음. 박세혁 옮김. IVP.


우리의 인간됨에 충실하려면 책임감을 가지고 잘못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이 회개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lcoholic Anonymous)의 현명한 충고처럼, 우리의 삶을 거짓 없이 철저히 드러낼 때 비로소 술에 취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  


국가를 개혁하기 위해 기독교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다. 우리가 순결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리다.


사제에 의한 성추행 추문은 희생자나 가해자, 모든 신자들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 주지만, 악을 드러내고 지적하는 것은 정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은총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것은 모두 선을 위한 일이다. 


마음과 정신을 유혹하는 것은 쾌락만이 아니다. 권력과 재산 역시 우리를 유혹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상태를 보여 주는 가장 놀라운 징후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전쟁에서 젊은이들의 목숨을 희생할 용기는 있으면서 '덜 탐욕스럽고 덜 낭비해야' 한다고 말할 용기는 없다는 사실이다. 


자아의 죽음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훨씬 전에, '무엇을 먹는가, 무엇을 건설하는가, 무엇을 사는가'가 우리의 본질이라는 신화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다. 인간으로서 나약함, 무방비 상태, 피조물로서의 실존에 대한 두려움은 소비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각기 다른 이 사례들의 이면에는 우리의 참된 자아,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 우리의 정신적, 신체적 부족함을 거부하려는 모습이 숨어 있다.


자신의 내면과 연결되지 못하는 우리는 다른 이들의 내면과도 연결될 수가 없게 되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격과 접촉하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받아들일 줄도 모른다.


사물은 상처 받지 않는다. 피를 흘리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죽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물과 상품, 물건을 제일 중요하게 취급하는 문화는 결국 상처 받기 쉬운 인간으로부터 도피한 문화일 뿐이다. 내면성을 피하거나 친밀함을 거부하거나 사람들의 가치를 부당하게 폄하할 때, 우리는 무방비의 인간 실존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복해서 묻는다. 당신은 이해하는가? 이해하는가? 어려움에 처했는가? 어려움에 처했다면 도움을 구해 보았는가? 도움을 구했다면, 당신을 도울 사람이 있었는가? 그랬다면, 그의 도움을 받았는가? 어려움에서 벗어났는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의식을 하며 사는가? 자아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신은 사랑하는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고 있는가? 사랑받고 있는가? 미워하는가? 내 말을 알아듣는가? 돌아오라. 반복해서 말하겠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라.

- 워커 퍼시Walker Percy, 「우주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실존으로부터 우리를 제도적으로 소외시키는 마지막 요인은 가난하고 상처 입은 이들의 절규를 듣지 않는 우리들의 태도다.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우리의 인간됨으로 '되돌아가라'는 광야에서 외치는 워커 퍼시의 목소리는 내적인 삶을 재발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단순함이 주는 기쁨을 새롭게 인식하고, 정의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재발견하라고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저마 다 독특한 인격적 실존을 지닌 사람들을 구속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과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결제적 세계에 총체적으로 반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상품 물신주의' 사람들은 점점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상품을 숭배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마치 인격체를 대체하는 것처럼 상품을 대할 뿐 아니라, 상품이 우리에게 의미와 목적, 살아갈 이유를 제공하는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대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인간성을 상실한 사물에 불과한 존재인 것처럼 서로를 대하게 된다. '물신'이란 만들어진 것, 인간 노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경건한 마음으로 숭배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물신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그것에 부여하고 물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 자신을 꾸민다.


우리는 성과 폭력, 포르노그래피에 사로잡혀 있고, 약물과 '연예계' 저녁 뉴스에 중독이 될 지경이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제한될 때 분노하고 '구속받지 않는 관계'를 선호한다. 우리는 3등급으 교육 제도와 3등급의 도덕 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도덕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그 결과 남들도 그들의 도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판단하거나 판단받기를 싫어한다. 다음 세대에게 엄청난 규모의 국가 채무를 떠안기고 엄청난 규모의 살상 무기를 남기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다음 세대의 필요에 무관심하다.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을 환대하지 않는다. 아무런 제한 없이 낙태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장차 성공할 아이들만 태어날 자격이 있다는 우리의 암묵적인 합의에 기초해 있다. 

- 「참되고 유일한 천국(The True and Only Heaven), 크리스토퍼 래쉬(Christopher Lasch)」-


소비주의는 실재의 체계(무엇이 가장 실재적이며 가치 있는 것인가에 관한 철학)인 동시에 종교(무엇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궁극적인 의미를 제공하는가에 관한 믿음)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을 잠식해 버렸다. 소비주의와 상품이 중심이 되는 삶의 형식은 우리의 다양한 경험이 그렇듯이 그 형식 속에서, 그 형식을 통해, 그 형식과 더불어 살악가는 통합적인 단일체로 이해해야 한다. 소비주의가 어떤 식으로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하나의 총체적인 세계관으로 보아야 한다. 소비주의는 그저 쇼핑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소비주의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사랑하고 기도하는 방식, 적을 평가하는 방식, 배우자나 자녀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소비주의는 '체계적'이고 '변증법적'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복음 역시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생활 세계'를 이루는 각각의 영역들을 관통하고 통일시키는 통합적인 단일체로 이해해야 한다. 복음은 그저 기도하는 시간이나 주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이 진짜라면, 우리가 예배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노동하고 노는 방식, 물건을 사고파는 방식, 사랑을 나누거나 전쟁을 대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는 먼저 성령이 다스리지 않거나 다스릴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에 영향을 주지 않거나 역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성령의 통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언가에 헌신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에 관해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이런 자유로운 행위가 사라져 버린 이유는 바로 상품의 제국주의 때문이다.

 

상품에 위해 규정되는 삶의 형식에서는 자기 가치와 자기 평가가 생산의 양, 소비, 경쟁의 관점에서 가늠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사물로 -혹은 더 많은 경우에는 걸림돌로- 대하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양이 목적이라면 충돌은 수단이다.

 

핵무기 버튼을 누르거나,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거나, 태아를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를 확대하겠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진 후보자들만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 성직자들과 정치인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용서와 봉사의 수사를 구사하지만, 자신의 권위나 권력을 보호하는 일에 관해서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일부 흑인 단체들은, 분명 평등과 정의에 관심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억압해 온 복종과 지배의 구조와 가치 속에서 더 많은 몫을 얻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일부 여성 단체들은 임금의 불평등과 그릇된 남녀간 역할 분담에 정당하게 항의하면서도 오로지 통제와 권력에 집중한다. 폭력과 지배, 남성 지배 문화를 향해 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사람들의 의식에 대한 혁명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를 가장 심하게 억압해 온 불의의 구조를 반복하고 확장하자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불의는 더 광범위하게 퍼진다.

 

가톨릭 국가주의자들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폭탄이라고 선언하게 만든 것, 혹은 가톨릭 좌파들이 가난한 이들의 가장 확실한 희망은 무기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런 사물에 대한 숭배와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폭력성이다.

 

비판과 참된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제도와 구조 안에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해방과 혁명 운동 속에까지 침투한 상품 형식의 가치에 대해 개인적으로 치열하게 저항해야만 한다.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영역(심지어는 서로 상충되는 영역들까지도)에 적용되는 공통된 기준은 힘과 강압, 폭력에 대한 암묵적인 믿음이다.

 

우리는 관계의 힘이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 관해서가 아니라 무력과 폭력, 자기방어라는 가짜 힘에 관해 전문가가 되었다. 우리는 자신이 사물처럼 그 효력이 금세 다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우리의 삶을 갈등으로 혹은 다른 '사람-사물'이나 '국가-사물'과의 경쟁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우리를 극복하거나 대체할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느낀다. 조작과 통제, 지배와 기술이 우리가 신뢰하는 친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생산되고 판매되고 소비된다.

 

자유와 인격이 아니라 복종과 맹목, 예속, 무가치한 사물에 대한 숭배를 요구하는 다른 모든 신은 인간의 경배를 받을 가치가 없다.

 

복음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반문화적이며 가장 혁명적인 문서다. 복음은 우리 문화에서 인간을 인식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형식과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관점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그분이 따르는 이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게 해주는 메시지나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충격을 줌으로써, 궁극적인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되는 상황을 제시해서 이 근원적인 선택에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궁극적인 믿음으로, 아무런 조건이나 제한 사항이 없는 진정한 결단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 부르심은 너무나도 단순한데,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삶에 집착하여 우상숭배라는 숨막히는 고립 상태 속에서 그 삶마저 잃어버리든지, 아니면 그 삶을 잃고 버림으로써 삶을 확장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든지 결단하라는 부르심이다.

 

예수는 우리의 가난 한가운데서 해방을 선포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가난을 부정하지 않고, 가난을 부정하고 우리 자신을 노예 삼으려는 압제와 맹목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그분의 동시대인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분을 거부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인간성과 우리의 이웃, 우리 자신까지도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처음에는 두려운 일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 우상을 포기하고 고통스럽게 우상과 결별하는 것은, 곧 우리를 짓누르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손을 펴서 우리의 궁극적인 본질을 붙잡는 것이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앞에 겸손한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씀을 마주하고도 계속해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굶주린 이들, 갇힌 이들, 집을 잃은 이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 교회 다니는 신자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용주의나 빈틈없는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성모독으로 '이들 중 가장 작은 사람'에게 등을 돌린다면, 그들은 바로 자신들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고, 가장 위대한 계명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자신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행하는가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인간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관한 믿음이다.

 

교회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인됨을 부인하고 성공, 권력과 힘, 위대함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가 된다고 고집할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십자가마저도 거부하는 셈이다. 구원을 획득하고, 얻어내고, 우리가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구원을 위해 경쟁하고, 거래하고, 팔고,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상품화된 복음의 진부한 표현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의 복음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인류와 하나 되신 하느님은 힘이나 관대함으로 우리를 조정하거나,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우리를 지배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예수와 그들 자신의 인간됨을 통해 하느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오라고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폭력과 속임수, 노예 삼는 방식은 고통을 감수하고 사랑하며 자신을 내어 주는 삶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에 속한다.

 

인류와 하나 되신 하느님은 힘이나 관대함으로 우리를 조정하거나,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우리를 지배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예수와 그들 자신의 인간됨을 통해 하느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오라고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오히려 예수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는, 나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내 존재의 문제를 자유롭게 외치는 감탄으로 변화시키라는 부르심과도 같다. 나는 자유롭게 믿는다! 나는 자유롭게 신뢰한다! 나는 자유롭게 나눈다! 이런 감탄을 통해 인간은 서로간의 관계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자신의 자아를 믿고 신뢰하는 것, 다른 사람을 믿는 것, 인격적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은 두 가지 위대한 사랑의 계명이 서로 비슷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사한 행위다. 각각은 어렵다. 그 각각은 우리의 실존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직면하게 한다. 그 각각에는 어둠과 오해, 부재감이라는 밤이 있다. 그 각각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내어 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 각각은 우리 자신이 궁극적인 중심, 정당성의 근거,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상처 받기 쉬운 상태에 스스로 노출되어야 하며, 심지어 '자신'에 대한 죽음을 요구한다.

 

우리의 인간성이 지닌 부족함, 우리의 불안정한 우발성과 미완결성, 우리의 개방성, 삶과 사랑의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우리의 미약한 능력, 이것이 곧 우리의 강점이자 아름다움이다. 그리스도가 그토록 전심으로 의탁하셨던 것은, 이토록 두렵고도 아름다운 부족함이었다.

 

복음은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끌어안으며 살아가도록 하는 가치와 시각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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