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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본문

雜食性 人間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하나 뿐인 마음 2015. 7. 20. 15:24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스밀라가 밝혀낸 것은 

이사야의 죽음이었을까. 삶의 의미였을까. 눈과 빙하와 바람과 빛으로 가득찬 과거의 이유였을까. 

사랑이었는지조차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이사야와의 화해였을까. 

미련없이 떠나간 스밀라의 엄마와 미련 없이 남겨진 이사야의 엄마.그리고 스밀라 혹은 나에게 남은 미련과의 작별.

 

어릴 적 친구들이 가로수길에 모여 한잔 했다는 사진을 보내왔다. 꼬맹이적부터 성당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 마흔을 넘기고 엄마 아빠가 되어서도 하하호호 웃으며 술 한잔 기울이고 있는 친구들 사진을 멀리 타역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에 머물러 본다.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며 멈추기 보다 더 나아가길 택했던 스밀라처럼 나 역시 '이젠 돌아갈 수 없다'가 아니라 '나아갈 일만 남았다'. 찍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진을 보며 이삼십 년을 훌쩍 넘긴 기억들을 끄집어 내고, 빛이 바랠 법도 한 그 기억에서 내가 걸어가야할 앞으로의 시간을 가늠한다.

 

나는 슬퍼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경찰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율리아네에게는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빌려준 뒤 그녀를 친구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느라 나의 슬픔은 내내 왼손에 꼭 틀어쥐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슬픔에 무너질 차례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건들이 수없이 모여 있다 보니, 자그마한 핑곗거리 하나만 생겨도 어지러워질 것 같았다.


나도 내가 라운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멍청히 속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포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할 필요를 느낀 것뿐이리라.


어머니는 오래된 조개 껍질로 만든 파이프를 피웠다. 어머니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을 때는 파이프 껍질을 벗겨낸 뒤 그 껍질을 입에다 넣고 "마마르토크"라고 말했다. '근사하다'라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말을 못하는 척했다. 침묵을 지키는 것 또한 하나의 기술이다.


이전에 그랬듯이 나는 참여하고 싶은, 부분이 되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


나는 공간적 자유를 아이처럼 안고 있으며 여신처럼 숭배하고 있다.


내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어떤 것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없다. 마치 남겨놓고 가는 유일한 것인 양 매 걸음을 떼어야 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울을 덮어버리려 할 수 있다. 구세주 교회에서 바흐의 오르간 작품을 들을 수도 있다. 마약 가루라는 형태로 된 즐거운 기분 한 가닥을 면도날 달린 손거울에 담아 빨대로 마실 수도 있다.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전화를 걸어 누가 귀를 기울여줄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런 건 유럽식 방법이다. 행동을 통해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나는 그린란드식 방법을 취한다. 그것은 어두운 분위기에 침잠하는 방식이다. 내 패배를 현미경 아래에 올려놓고 그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수리공의 아파트 문 앞에 멈춰섰다. 나는 그를 함께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 감정이 연약함의 한 형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리공은 숙련된 일꾼이고, 노동자다. 율리아네는 쓰레기다. 그리고 나, 나는 누구지? 과학자인가, 관찰자인가? 외부에서부터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던 사람인가? 외로움과 객관성을 각각 동일한 비율로 섞어서 이뤄진 시각에 의해서? 아니면, 나는 그냥 감상적인 머저리일 뿐인가?


"내가 한 말 들었겠지? 우리가 목적지도 모른 채 항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나?"


오랜 시간을 기댜려야 한다면, 기다리면서도 자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다림은 파괴적으로 변한다.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다른 재능을 요구한다. 훨씬 더 세속적이고 훨씬 더 명확한 시야를 가진 무엇인가를. 훨씬 더 쓰라린 무엇인가를.


그들은 언제나 모순적인 진실보다는 간단한 거짓말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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