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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토머스 머튼 본문

雜食性 人間

토머스 머튼

하나 뿐인 마음 2015. 4. 16. 03:55

 

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

키스 제임스 지음. 김은해 옮김. 비아.

 

이미 십여년 넘게 머튼의 작품이 널리 읽히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앙망해온 나로서는(그럼에도 불구하고 머튼의 사상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바 없는) 이 입문서가 영 성에 차진 않았다. 하지만 머튼이 생소한 사람들에겐 충분한 책이 되리라.


입회한 후 나는, 그가 찾고 발견한 처절한 고독과 심연의 침묵, 그러면서도 그가 놓지 못하는(놓을 수 없는?) 세상의 불의과 고통에 대한 끝없는 흔들림에 대한 책임감을 부러워했었다. 그가 홀로 머물었던 공간과 그의 소임, 그의 재능과 그의 흠집마저도 내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도자로서 비밀스런 질투의 대상이었다.


하느님 앞에서(비록 당장 눈앞에는 사람들이 즐비하더라도) 철저하게 자신을 까발릴 줄 알았던 머튼, 잡다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직진할 줄 알았던 머튼, 누구보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갈망했던 머튼은 (건방지게도) 내 수도삶의 모델이요, 도반이다.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다. 수도원에 있음으로써 나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투쟁과 고난에 진실로 참여한다." (요나의 표징)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사는 거룩한 존재라는 꿈은 모두 망상이다. 이는 내 소명을 의심하거나 내 수도원 삶의 진정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내가 회의한 것은 우리가 수도원에 대해 너무나 쉽게 착각하는,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관념이다... 나는 우리가 수도원을 생각할 때 암묵적으로 깔고있는 이 순진한 망상을 16-17년 동안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인류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운명이다.. 나는 내가 인간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몸소 성육식하신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하는 길이다.

 

사랑을 향한 부르심은 시토회의 핵심 가치다. 이 수도회의 창시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사랑이라는 길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가장 탁월하게 지켜나가는 방법이라고 썼다. 매일 매일 더 영적으로 진보하고 싶다면, 사랑 안에서 마지막 날까지 인내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길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이웃을 향한 연민을 하나로 묶는다.

 

오늘날 삶이 지닌 분주함과 압박감은 아마도 현대적인 삶이 내포한 폭력의 가장 일반적 형태일 것이다. 서로 상충하면서도 다양한 관심들로 인해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에 빠져있는 것, 무수한 요구에 굴복하는 것, 무수한 일을 벌이는 것, 모든 일에 모든 이를 돕고자 하는 것 모두 폭력에 복종하는 것이다.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

 

관상을 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우리가 활동하는 이 세계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관상이 없다면) 우리는 작고, 제한되어 있고, 나뉘고, 부분적인 상태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불충분하게, 동시에 영속적으로 우리 자신이 속한 공동체, 우리 자신이 지닌 흥미와 결합하려 한다. 정의와 자비의 관점을 내버린 채 순간의 열정만을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배신한다."(The Complete works fo Thomas Merton) 관상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강박증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히며, 선함을 행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해하려 들기 십상이다.

 

관상은 새로운 세계를 자기 스스로 건설할 수 없다. '그러나' 관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행동해야 할 중요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관상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잃어버린다면, 침묵이 없다면, 사랑을 통해 은밀하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느다면 우리의 행동은 세상에서 그 목적을 잃으며 위험해진다. (Philip Sheldrake, 'Thomas Merton's Contribution to 20th Century Spirituality,' in The Merton Journal, Eastertide 2005, Vol 12, No.1)

 

그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는 예언자적 소명을 포함하며 단순히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양심 깊은 곳에 있는 차원을 뒤흔드는 것"이라 믿었다. ... 그리스도교인은 "참된 예언자가 되어 번민할지", "거짓 예언자가 되어 이 사회에 넘쳐나는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찾고 썩은 고기를 즐길지"를 선택해야 한다.

 

머튼은 건강한 교회란 예고(세상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선포하고 알리는 것)와 경고(정의롭지 못한 것을 분별하고 거짓에 저항하는 것)라는 두 부분을 한 데 모아 에언하는 공동체라 믿었다. 교회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을 만들어가는 공동체다.

 

우리는 우리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결과에서 초연해지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물러서야한다. 우리 행위의 결과는 어느 정도 우리가 조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우리는 즉각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은 채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순간적인 만족에 기대지 않은 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특별한 인정도 바라지 않으며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사실, 매우 크고 위대하다. 그러나 위대해지고자 하는 모든 열망을 내려놓지 않으면 위대함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사막 영성에서 시험은 오직 다른 이를 위해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그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필사적으로 신경증에 걸린 것처럼 다른 이를 필요로 하는 것을 중단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거친 풍광이 주는 위로The Solace fo Fierce Landscape, 벨든 C.레인 Belden C. Lane)

 

초연함은 바란 결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을 느낄 때 이를 감추는 것이 아니다. 역경을 마주할 때 선승처럼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도 아니다. 초연함은 진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진리에 집중할수록 결과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 초연함을 유지하면 우리는 낙담하는 가운데에도 신실하게 행동을 이어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리스도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느낌으로써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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