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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용서라는 고통 본문

雜食性 人間

용서라는 고통

하나 뿐인 마음 2015. 2. 21. 09:45

스티븐 체리 지음. 송연수 옮김. 황소자리.


'상처의 황무지에서 싹틔우는 한 줄기 희망'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용서가 자기 앞에 닥친 현실이 돼버린 사람들의 실제 '경험'과 그저 막연히 글로 써놓은 용서에 대한 '관념', 그 사이의 괴리를 메우기 위한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용서는 결코 쉬운 해결책도 즉효의 처방도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는 고통이다. 다만 그냥 고통이 아닌, 치유의 고통이다.

 

성서든 예배든 성찬례든 윤리든, 기독교는 용서라는 말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하고 행하고 제안하게 될 진지한 사고인 신학과, 용서가 중요해보이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간에는 괴리가 있다.

 

첫째, 용서는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가 않다. 다시 말해 모든 용서 이야기는 헤아리지 못할 숨겨진 깊이를 가지고 있다.

둘째, 용서 이야기는 역사적인 맥락이 대단히 중요하다. 즉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뿐만 아니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같이 살펴야 한다.

 

"용서는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감정이 그렇게 간단히 바뀌지는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C.S. 루이스) 

 

모든 용서, 특히 진정한 용서라면 하나같이 어렵고 힘들다. 왜냐하면 용서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부당한 상처에도 자비를 보이려는, 그와 동시에 스스로를 치유하려 애쓰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처절한 몸부림,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할 깊은 번민과 고뇌와 갈등의 결과다. 하지만 자아 안팎에서 선악과 끈질기게 겨루고 난 후의 용서는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심리치료학자 버너딘 비숍)

 

"열정이라고요? 에드워드. 열정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건가요? 우리 안의 삐뚤어진 열정을 죽이는 것도 열정이에요. 말장난하려는 게 아니예요. 가장 진실하고 용감하고 성숙한 열정은 발을 구르며 자신을 몰아가지 않아요. 분노에 휩싸여도 그 분노에 휩쓸리긴 거부하는 게 열정이에요. 이 세상 그 무엇도 의지력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없어요. 오직 인간만이 그런 특권을 가지고 있죠.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우리 옆구리를 파고드는 이 뾰족한 창을 우리 스스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빼내야 하죠. 그 속의 창자까지 같이 딸려나오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연극 <고곤의 선물Gift of the Gorgon>

 

헬렌이 주장하는 열정은 내가 상처받거나 남이 상처받는 걸 보았을 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분노, 복수, 비통, 원한을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는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상처에 평생 사로잡혀 있거나 우리를 다치게 한 자들에 의해 한계가 지워진다거나, 그로 인한 피해의식에 짓눌리고 꺾이지 않으려는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만 용서도 가능하다. 억지로 강요된 용서는 용서라고 부를 수 없다.


어떤 경험들은 도리어 우리를 쓰러뜨린다. 그런 상태에서는 대처한다 해도 다시 상처받고, 더욱 무력해질 뿐이다. 수치심과 자기비하의 정도가 지나치게 깊어지면 끝내 자아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기도 한다. 고문이 그 극단적인 예다. 고문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집요하고 만성적인 속성을 가진 괴롭힘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놀이터에서 공원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꽤 오랜 기간 동안 자기보다 강한 누군가에 의해 학대받는 일, 정치·사회·경제적 억압에 시달리는 일은 전부 고문이다. 고문, 폭행, 수년간으 학대나 괴롭힘은 피해자의 자아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아의 핵심 부분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행위다. 


배신을 당하면, 그것도 여러 차례 겪고 나면 모든 것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큰 상처를 남기는 배신은 피해자를 용서할 능력조차 없는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러한 용서 능력의 상실은 배신행위에 따른 결과이지 배신당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 


'용서할 의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의 도덕기준과 양심, 정의감을 모두 내버리고 "신이 나를 용서하시므로 나도 당신의 죄를 묻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겠다."라고 말하라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의 진정한 메시지는 한쪽엔 닫히고 다른 한쪽엔 열린, 그런 분열된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도 들어가는 '전환'의 순례길에 오를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분개와 증오, 비통을 마음속에 계속 쌓아둔 채로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는 의미다.


우리가 부당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라면 인지적·감정적, 어쩌면 행동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표출하는 일은 정당하다. 가해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알아차리고 이에 억울한 감정을 느끼고 뭔가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행위는 당연하다는 얘기다. 


용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용서할 수 없을 때에도 무조건 용서하라."가 아니라 "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사랑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그럼으로써 그 소용돌이가 우리의 존재 그리고 행동과 태도를 포함한 우리 모습 전반에 새로움을 일깨우고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라는 의미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용서는 여전히 중요하다. 어느 면에서는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 용서가 불가능한 경우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말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무리 악독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가 용서이며, 용서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거라는 뜻이 아니다. 

첫째, 용서는 절대 간단히 행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둘째, 성급하고 섣부른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나아가 이들이 속한 사회와 인류 공동체에까지 해가 미칠 수 있다.


용서는 정말로 마음으로부터 천천히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 마음은 용서의 불가능성과 용서의 필요성 사이의 긴장상태를 감당할 준비도 돼 있어야 한다.


기독교적 용서 의무는 신과 같은 사면의 권능, 즉 용서를 베풀거나 거두어들일 선택권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용서하는 마음을 함양하고, 공동체 차원으로는 용서의 정신과 기풍을 확립·유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과 기독교 공동체의 의무라는 뜻이다. 또한 용서는 윤리적이기만 한 문제도, 어떤 권위의 행사도 아니다. 그보다는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정신의 문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용서할 의무'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할 필요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스스로를 정신적 긴장과 투쟁 속에 던져놓고 치유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 용기와, 상처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정신적·정서적 아픔을 극복해나가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서는 분노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분노의 지속이나 악화에 대해서는 경고하지만 분노를 엄연한 삶의 한 단면으로 인정한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에페 4,26) 이 말은 나쁜 건 화 그 자체가 아니라 화로 인해 저질러지기 쉬운 죄라는 뜻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정당한 화, 다시 말해 불의에 대한 '똑똑한 반응'인 분노를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자아도취에 빠진 나르시시스트들이 공격적인 이유는 자기애가 지나친 나머지 자신들의 요구가 언제나 우선시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인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핍돼 있다. 또한 그들은 응당 받아야 할 존경을 못 받고 있다고 여기면 서슴없이 분노를 표출한다. 자신들이 남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더 많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근거에서다. ('자아도취병', 진 트웬지, 키스 캠벨 공동 저자)


용서는 우리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반대로 불의를 보면 분노의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고 일깨운다.


건강하고 뜨거운 '일상적인' 화, 즉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하지만 간혹 그 화가 우리 마음속에 오래 머물거나 때론 아예 자리를 틀기도 한다. 이렇게 정착된 분노가 소위 '분개'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감정이다.


용서는 우리에게 정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시하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우히려 정의에 귀 기울이고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상황에서의 용서는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할 수 있다. 자신의 분개가 정당한 것인지 따져보게 하고, 충분히 그렇다면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진짜 위험은 '인내'의 범위가 '사소한 단계'를 넘어선 가해행위에까지 확대되는 데 있다. 지나치게 참다보면 참는 데 익숙해지고, 화낼만한 상황들에 대해서도 무시로 일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불의를 봐도 분개할 줄 모르게 된다. 무조건 참기만 한다면 혹은 게으르다 싶을 정도로 너무 착하게만 군다면, "안 돼! 이건 단순한 성가심이 아닌, 절대 부당한 일이야!"라고 말하는 감정의 외침을 스스로 틀어막는 꼴이다. 반면 일례로 과거 직장동료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수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때 그런 감정을 누그러뜨리도록 곁에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이 또한 잘못이다. 때로는 분개에 귀 기울이고 그에 따른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또 때로는 분개를 너그러이 놓아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어떤 경우든 신중하고 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피해자의 올바른 용서도, 그런 피해자를 제대로 돕는 일도 가능하다.


분개가 완강하고 끈질긴 속성을 띠게 되면 '원한'이라 부른다. 성격으로 굳어진 원한은 남은 삶 전체를 소진시켜버릴 위험이 있다. 원한은 이를테면 생존 기제다. 위험이 가시면 구명조끼를 벗듯 원한도 벗어버려야 한다. 


용서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용서하려는지 잘 따져보고, 그 용서가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 아니면 더 못한 곳으로 만들지 자문해봐야 한다. 용서는 윤리적 차원을 피하기 힘든 심리적·영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억압적인 상황이 지속되는 한 그때의 원한은 마땅히 옳다. 단, 상황이 변할 경우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때 원한을 품었더라도 이를 풀어버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원한은 부당한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유효하다. 기억 속에 있는 사실 때문에 원한을 품게 되는 순간, 그때부터는 이미 다른 영역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좋은 원한이 나쁜 원한으로 변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원한에서 쾌락과 위안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앙심 품기를 낙으로 삼고 심지어 자신의 성격으로까지 만들어버린다. 원한을 아예 친숙한 감정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무자비한 태도에 대한 이유나 핑곗거리로 이용한다. 용서라는 치유의 고통을 감수하기보다 쉬운 쾌락에 경도되거나 안주하려는 성향이다. 분노는 성숙함이나 감정적인 자제력에 의해 통제되지만, 원한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풀리게 된다.


기독교 복음서들이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고자 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설파하지만, 이 말이 곧 "과거에 누군가가 무슨 짓을 했든 현재 그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우리는 그를 완전히 용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도 사람을 가려서 용서해야 한다거나 곤란하고 의심스러울 때는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는 단연코 용서를 지향하는 종교다. 


우리는 종종 용서를 망각이나 묵인, 아량이나 인내와 혼동한다. 용서는 그저 잊거나 봐주거나 털어버리거나 참는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정당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으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의 삶을 더 비참하게 만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할 의무"마저 져버리게 된다. 결국 용서 욕구의 문제점은 가해행위를 용인하거나 무시하려는 쪽으로 우리의 의향을 몰아간다는 데 있다.


용서를 의무로 여기는 사람은 오랜 악행을 묵묵히 감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보면 정의와 자비의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균형감각을 놓치고 만다. 또 다른 위험성은 용서가 온당치 않는 상황에서도 피해자가 용서할 수 없음을 자책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법, 남들도 나를 용서해줄 수 있다고 믿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 썩어들어가던 실수더미들과 마주치곤 했지만 그것이 또 내게 퇴비가 된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우치게 되었다. 아울러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인정하기 싫고, 지워버리고 싶던 것들을 더 이상 밀어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결국 그 모든 것들 또한 나의 일부이므로 오히려 그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는 편이 더 현명한 일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용서는 하느님께서 피해자로서 우리의 사과를 받아주시고 모욕을 눈감아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하느님이 아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용서다. 죄를 지을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모욕과 상처는 하느님이 아닌 오직 우리 자신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말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입힌 상처로부터 우리를 회복시켜주신다는 말이다. 즉 하느님의 용서는 재창조와 구원의 용서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의도된 폭력행위가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가 설령 가해자의 뉘우침을 반기며 몇 마디 친절한 말을 건넸다고 해서, 지속적인 고통과 장애를 초래한 가해자의 책임이 간단히 벗겨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용서 충동 또는 너그러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는 그래서 더 신중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절제된 용서'의 자세는 가해자의 변화는 무시한 채 용서자의 우월감과 미덕만 과시하는 소위 '영웅적 용서'를 바로잡는 일종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 부추기기의 위험성은 현재 지속적인 협박이나 억압,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마저도 용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데 있다. 이 같은 이유로 피해자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 


용서 충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용서할 거리를 억지로 찾게 만든다. 심지어 화가 나거나 언짢게 느껴야 할 상황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든다. '이 일은 어째서 나를 분노케 하는가? 이 일이 내게 던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새로 알게 된 진실과 통찰에 비추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는 대신 '가해자에게 뉘우치는 기색이 없더라도 용서해줄 만큼 관대하고 훌륭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이것이 바로 '용서자 신드롬forgiver syndrome' 이다. 강한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런 성향을 띤다. 문제는 실제 일어난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다.


용서 욕구가 초래하는 문제는 또 있다. 용서하려는 마음이 쉽사리 들지 않는 데서 느끼는 강박이 아니라, 반대로 용서하려는 열망이 지나치게 앞서는 데서 오는 충동에 관한 문제다. 자기 자신을 훌륭한 '용서자'로 보려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사람으로 비치고 싶다는 열망은 도덕적 우월감과 뒤섞이게 마련이다. 스스로를 용서자로 본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자기 자신을 매우 좋은 사람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반면 다시 신뢰감을 갖기에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 상처준 이에게 다시 웃어주고 망설임 없이 껴안아주고 '용서한다'고 말해주기에는 분노와 분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사람으로서 자신을 보는 것은, 불편하고 못마땅한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한 내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다.


진실하고 깊고 값진 용서는 탕아의 아버지나 신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탕아나 큰아들과 다를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용서는 상처를 참아내게 해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 어떻게 보면 용서란 매일 매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용서는 고통이자 사랑이다. 현명한 용서자는 자기 안의 날카롭게 찢긴 구멍을 그냥 덮기보다 보듬고 살아가는 법을 찾으려 애쓴다.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내 고통의 가장 깊은 곳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 어떤 방식으로든 아픔을 함께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치유와 화해의 길이 열린다. 이렇듯 서로 공감하는 일은 도덕적인 인격과 영적인 인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의 일부다.


"용서를 종종 유약함의 표현으로 간주하지만, 용서 여부에 대한 결정은 역설적으로 피해자를 가해자의 소망 열쇠를 쥔 힘 있는 위치로 끌어올린다."(고보도 마디키젤리) 용서가 단순히 가해자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라면 가해행위를 "묵인해줌으로써" 도리어 피해자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박탈당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진정한 용서는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에 그녀는 이렇데 덧붙인다. "용서는 가해자가 저지른 행위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한 인간으로서 나는 네가 내게 저지른 악행을 똑같이 반복할 수 없으며 반복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피해자의 승리다." 그녀는 이를 일종의 복수라고 말한다. 단, '고귀한 복수'다. 용서는 피해자 자신, 가해자 그리고 제3자에게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고귀한 행위다.


삶이나 건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강한 분개를 품는 일은 실제로 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정의를 위해 꼭 필요하기도 하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정의로운 대의를 지키는 것이 더 올바를 때도 있다. 개인적인 행복이 윤리의 궁극적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공연한 용서 남발이 위험하듯 분개나 적개심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일도 위험하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자신의 부당한 상처와 피해에 대한 현실감을 잃어선 안 된다. 오히려 현실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가해자에게 공감을 손을 내밀어야 한다. 용서는 상처의 황무지에서 시작되지만, 자신이 디딘 곳이 상처의 황무지라는 현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면 용서는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비록 내 마음은 당신이 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내게 준 고통으로 인해 당신이 느낄지 모를 고통이 들어올 자리도 내 마음속 공간에 남겨두려 노력합니다." 이렇게 표현해야만 용서는 확실히 보장된 것이 아니며 미리 결론짓거나 강제할 수도 없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조차 모르는 일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또한 충만한 삶은 사람 사이의 연대와 유대감, 즉 '공동체'와 '교감'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책무라는 점도 명확해진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현명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성급히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가해자가 한때 심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른다고 쉽사리 말하지 않는다. 혹은 가해자의 과거가 현재의 범죄행위를 충분히 납득시키는 사유가 된다거나 심지어 무죄를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현명한 피해자가 이런 논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학대는 학대를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 무한반복의 악순환에 결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피해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행위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어떤 경우에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는 아직도 상처로 고통받고 잇지만 상처의 결과에만 집중하지 않겠다. 이미 지난 일로 더 이상 격분하지 않겠다. 그건 나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분노, 분개, 원한을 놓아버리자. 내 안에 가해자를 가둔 차가운 감옥의 자물쇠를 풀고 그를 내 공감적 상상의 공간으로 불러들이도록 노력해보자. 그에게도 치유의 기회가 될지 모른다. 내가 이렇게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내 마음속 감옥을 비워내는 게 스스로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분노, 분개, 원한은 평생 짊어지고 가기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폭력과 보복의 고리를 끊기 위해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은 그 어떤 가혹 행위보다 파괴적이다.'

기독교 신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뜻도 될 것이다. '내가 용서하는 이유는 용서가 피해자로의 나를 내어주는 선물이자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도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서가 진정 꺾어야 할 대상은 죽고 죽이는 악의 흉포한 힘이다. 악에 대한 자비의 승리, 비정에 대한 공감의 승리다. 소외에 대한 치유의 승리, 냉혹함에 대한 관대함의 승리다. 용서하는 마음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며 그 대가로 피해의식이 지배했던 과거 대신 가능성이 열리는 미래를 얻는다.


고통은 가해자가 뉘우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해자의 뉘우침이 없다고 해서 (가해자와의)공감의 필요성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자신이 걸어들어간 달갑지 않은 공감의 강물 속에서 그냥 고통이 아니라 치유의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강물에 몸을 맡긴 동안 피해자는 자신이 받은 상처와 뜻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엄청난 분노 그리고 가해자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깨달음 사이에서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한다.


용서는 화해와 다르다. 만일 내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면 그 사람과 다시 예전처럼 지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용서를 두려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용서는 새로운 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이다. 용서는 상처와 피해를 묵과하지 않는다. 폭력과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잔인한 진실을 더 넓은 목적과 현실이라는 맥락 안에서 숙고한다.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용서 부추기기'와 '용서자 신드롬' 이외에도 문제가 빚어질 만한 '변질된' 용서들도 있다. 기본적으로 가해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치유적 용서가 그 하나이며, '뉘우침에 의존하는 용서'가 또 다른 하나다. 가해자의 뉘우침을 조건으로 하는 용서는 가해자가 마음의 변화를 보일 때까지 피해자를 가해자의 포로로 만들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걸머지우는 결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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